2017년에서 가장 미안했던 순간 중 하나
1.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경험이 있을 겁니다. 물론 어느 순간에는 조부모님 혹은 부모님, 가족들이.... 언젠가는 일어날 일 중 하나죠. 저에게는 어머님이 그랬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어머님이요. 저에게는 모든 것이었던(그 당시에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어머님은 아파서 요양병원에 계셨는데, 7월 어느 주말에 교회에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머님은 그 당시 스마트폰을 배우 신지 얼마 안 되셨을 때였는데 출발하기 전날에 어머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것저것 챙겼느냐 저를 챙기시는 어머님의 전화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잔소리로 알아들어 일찍 어머님과의 전화를 끊었습니다. 다음날 교회에서 차가 출발하고 나서는 1시간이 지날 때 쯔음 아버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부고 소식을 알리는 전화였죠. 저는 흔히 말하는 멘붕이 왔습니다. 교회 나들이를 가는 차에는 집사님이 운전을 해 주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차마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일이 생겨서 가까운 터미널에서 내려달라고 그랬었죠. 그리고 어머님의 고향이던 남원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네요. 저 당시 제 나이는 17살이었습니다. 여전히 7월 28일이 저에게는 가장 아픈 순간이었습니다.
2.
필리핀에서도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차라리 제가 대신 아팠으면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글에 자주 등장할지도 모르는 ‘조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흔히 조카라 하면 친구의 자제들 역시 저희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조카라고 부르죠. 이 ‘시부얀’ 섬에서는 저는 ‘꾸야 재키’였습니다. Jackie는 제가 학원을 다녔을 때부터 사용했던 영어 이름입니다. 지금까지도 역시 해외에서는 저 이름을 사용합니다. ‘꾸야’라는 표현은 필리핀에서 나이가 많은 남자를 부르는 ‘형’,’’오빠’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이 섬에서 처음 도착한 그 날부터 저는 이 마을 모든 어린이들의 꾸야였습니다. 필리핀에서 생활하기 전에는 저는 아이들을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더라고요.
영어를 대화 수준으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던 이 동네에서 말을 안 해도 잘 통하는 이 마을의 아이들은 그 날부터 저의 절친이 되었습니다. 아이들 역시 저를 참 좋아해 주었습니다. 외국인이 거의 오지 않는 섬에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는데, 저는 외국인으로서 참 과분한 사람을 받은 것 같습니다. 바로 전 글인 제가 선생님이 되었던 이야기부터 아이들은 저를 잘 따라주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제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에너지였던 것 같습니다.
3.
이 날은 주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 평소 같으면 아이들이 등교를 하고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거든요. 전 글에서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마을은 제가 하숙을 하던 아저씨 집이 가장 큰 집이었고 이분들의 가족들은 이 섬에서까지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친인척이 아니면 거의 다 산에서 나무로 집을 짓고 사는 정말 저희가 아는 필리핀의 가난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순수하다고 소문이 난 필리핀의 아이들은 참 저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날은 아직까지고 저에게 미안한 날로 남았지만요.
저는 산에서 내려오면 있는 길 앞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요. 저 멀리서 아이들의 무리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를 가장 좋아해 주던, 저 역시 가장 제가 좋아했던 아이가 저에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손을 벌리며 안아주려고 한 순간 옆에서 보이지 못한 물체가 쾅!! 하고 제 앞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자전거였는데 그 아이가 자전거에 부딪치고 만 것이었죠. 아이들 살펴보는데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ㅜㅜ. 저는 순간 당황해서 그 아이를 않고 나서는 제가 있는 집으로 데리고 와서는 여태 질렀던 소리 중 가장 큰 소리로 ‘Hey!!!!’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나오고 그 아이를 바라보더니 웃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저는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는데 그걸 보고 당황해서는 더 큰 소리로 빨리 누구든 부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지혈을 하는 사이에 간호사 같은 사람 한 명이 와서 처치를 하고 이마를 꿰매 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7남매였는데 오빠들이 와서는 그 와중에 아이를 보면서 키득키득거리는 거 아닙니까?? 멘털이 나간 저는 화를 불같이 내면서 지금이 웃을 상황이냐고 혼을 내주었는데, 나중에 장례식에 참여했는데 다들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걸 보고 나서는 아 이런 나라구나...라고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4.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오는 자전거를 봤어야 하는데, 제가 먼저 산 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하면서 저를 자책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자전거의 주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 감정으로는 진짜 몇 대 떄리고 싶더군요. 그리고 마취에서 풀린 아이를 다시 봤는데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저렇게 웃어주더군요. 작년에 다시 시부얀 섬을 찾아갔는데 여전히 흉터가 있더군요. 미안했습니다. 필리핀 아니 저희 마을의 아이들은 참 저에게 고마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 날은 앞으로도 잊을 수가 없는 날 일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코로나로 직장도 잃고 돌아온 지금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쪽팔리지만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서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이때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우리 ‘조카’들이 참 보고 싶은 날입니다.
2020년 05월 3일 커피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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