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만들어낸 거대한 작품

바람의 걸작 듄 뒤 필라(Dune du Pilat)

by 장서은


파리의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미술관의 시간 속을 걷다가 우리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기 위해 남서쪽으로 향했다. 프랑스에도 사막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사막이라면 아프리카나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을 먼저 떠올리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보르도(Bordeaux)를 지나 아르카숑(Arcachon) 만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점점 낮아지고 공기에는 짠 바다 내음과 함께 소나무 숲의 향이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언덕’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거대한 모래의 벽이었다. 이곳은 듄 뒤 필라(Dune du Pilat). 프랑스 남서부 누벨아키텐(Nouvelle-Aquitaine) 지역, 아르카숑만 남쪽에 자리한 유럽 최대의 모래언덕이다. ‘Pilat’라는 이름은 가스코뉴 방언에서 ‘모래더미’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높이는 약 100~110m, 길이는 약 2.7km, 폭은 약 500m에 이른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이 모래언덕이 매년 1~5m씩 내륙 방향으로 이동하는 ‘살아 있는 지형’이라는 점이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모래를 밀어 올리고, 그 모래는 뒤편의 숲을 조금씩 삼키며 앞으로 나아간다. 실제로 모래에 묻힌 도로와 건물의 흔적도 발견된다고 한다.

자연이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나 분명한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듄 뒤 필라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크기 때문만이 아니다. 언덕의 한쪽에 서면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이 보이고, 뒤를 돌아보면 짙은 초록빛의 랜드(Landes)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사막과 바다, 그리고 숲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이 풍경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모습이다.


이 지역은 오랜 세월 동안 모래톱과 해류, 조류의 퇴적이 반복되며 형성되었고, 19세기 이후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조성된 광대한 소나무 숲이 오늘날의 독특한 경관을 완성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함께 빚어낸 거대한 풍경이다.


최고의 놀이터를 만난 손주들


손주들과 함께 맨발로 모래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 생각보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두 걸음 올라가면 한 걸음 미끄러져 내려오는 느낌이다. 모래는 너무도 부드러워 마치 고운 밀가루 위를 걷는 듯했고, 발끝으로 전해지는 감촉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우리는 자연의 속도에 맞춰 걸어 올랐다. 정상에 다다르자 말보다 먼저 풍경이 가슴으로 밀려왔다. 눈앞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대서양이, 뒤쪽으로는 모래에 잠식당하면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숲, 그 사이에 우리 가족이 서 있다. 그 순간 여행자는 어디에 와 있는가 보다 ‘얼마나 오래 이 풍경 속에 머물고 싶은가’를 생각하게 된다.


손주들에게 이곳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모래성을 쌓고 작은 조각품을 만들고,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오며 깔깔 웃으며 바람과 모래가 만든 거대한 자연 속에서 아무 도구도 없이 마음껏 뛰어놀았다. 문제는 내려온 뒤였다. 모래가 발이며 신발이며 바지 안쪽까지 파고들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딸과 사위는 손주들 발에 붙은 모래를 털어 주느라 한참을 애써야 했다. 그마저도 여행의 한 장면이 되어 웃음으로 남았다.


우리가 찾은 때는 겨울 초입이었지만 듄 뒤 필라는 특히 여름철이면 수많은 여행자가 찾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 명소라고 한다. 이 거대한 모래언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람에 의해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사막이 움직인다는 사실은 마치 옛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매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그 풍경을 떠올린다. 수천 년 동안 바람이 모래를 한 줌씩 쌓아 올려 저 거대한 언덕을 만들었듯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 간다는 것을. 우리는 그날 단순히 풍경을 본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 자연의 거대한 작품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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