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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 Apr 07. 2021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48평에서 5평 집으로 이사하기


어느 날 친구에게 카카오 톡이 왔다. 평소에 부탁을 잘 안 하는 친구인데 꼭 좀 봐달라며 인터넷 링크를 보냈다. 노원구 세 모녀 사건의 가해자 신상공개를 요구하는 국민 청원 링크였다. 가해자 김모군은 20대 남성으로 평소 피해자를 스토킹 했고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그 집에 있는 피해자의 동생, 엄마, 피해자를 모두 살해했다. 나는 이 끔찍한 사건의 살아있는 가해자가 엄중한 처벌받기를 바랐고 그 자리에서 바로 "동의합니다"를 눌렀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한 마음도 있었지만 단지 사회 정의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 사건이 남일 같지 않았다. 특히 자취를 하게 되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피부처럼 와 닿았다. 여자가 자취를 하면서 비껴갈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치안 안전"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립을 결정하기 전에 이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을 했었다. 종종 뉴스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어떻게 대처해야만 할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막상 자취생활을 했을 때 내 걱정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불편한 시선들이 존재했다.


동네 주민들 중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연배 있으신 분들은 노골적이었다. 내가 지나가는 걸음마다 시선이 따라갔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때 처음에 나는 똑같이 노골적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시선을 피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거리를 걷는 게 주저됐다. 나는 본래 산책을 좋아하는 "산책러"인데 내 행동이 제한되는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다.  


그중 제일 불편했던 것은 아저씨들의 시선이었다. 한 번은 길에서 반대편으로 걸어오고 있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시선을 피하고 내가 가는 방향으로 길을 걸어갔다. 그 아저씨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내가 가는 방향으로 같이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빠른 걸음으로 옆에 골목길로 들어갔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자 아저씨는 가만히 서서 내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의 사건도 있었다. 남자 친구가 내 자취방으로 놀러 왔을 때였다. 남자 친구는 평소대로 자취방 가는 길로 걷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남자 친구 앞에 한 여자가 걷고 있었는데 가는 방향이 같았다. 알고 보니 우리 원룸 주택 주민이었다. 남자 친구는 그 여자를 의식하지 않고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달랐다. 남자 친구를 의식하며 몇 번씩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눈이 마주쳤다. 그 여자는 심지어 남자 친구가 같은 원룸 주택으로 들어가니깐 굉장히 경계했다. 이에 남자 친구는 집으로 돌아오자 길이 겹쳤을 뿐인데 왜 나를 범죄자 취급하는지 억울해했다.


이로써 깨달았다. 알 수가 없다는 것을-. 길거리에 마주친 사람이 어떤 의도로 나를 쳐다봤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나에게 음흉한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지나가서 무심코 쳐다본 것인지, 또는 내 얼굴에 뭐가 묻어서 쳐다봤는지, 내가 아는 누구를 닮아서 쳐다봤는지 그 눈빛 하나 만으로 그 사람의 의도를 함부로 결정할 수 없고 쉽사리 잠정적 범죄자 취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선이 불편했다. 특히나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시선에 있어 더 예민해지고 경계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매번 "아저씨 왜 쳐다보세요?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명상을 했다. 내 몸속에 있는 두려운 감정을 내보내는 연습을 했다.




명상의 논리는 이렇다. 두려움, 화남, 기쁨 이런 모든 감정들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지금의 감정에 사로잡혀있거나 억지로 누르려고 해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마치 들숨과 날숨을 바라보듯 "아 이렇게 느끼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번 두려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감정은 점점 증폭된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부자연스러워지며 긴장으로 온몸이 굳는다. 그럴 때도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계속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보는 것이다. 두려운 감정을 느낄 때마다 "두려움, 두려움.." 이렇게 제삼자가 바라보듯이 객관화하여 계속해서 알아차린다. 그러면 어느덧 요란했던 심장 박동은 가라앉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이렇듯 명상은 하나로 묵여 있던 나와 나의 감정을 분리시킬 수 있게 해 준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도 이렇게 말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다. 그 공간 사이에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우리의 반응에는 성장과 자유가 있다." 명상을 통해 우리는 그 공간을 넓히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가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실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뇌는 외부적 위험상황에 아주 민감하도록 진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적 상황발생하면 경고음 울린다. 이 부분을 깊이 관여하는 곳이 우리 뇌의 편도체이다. 편도체가 활성화될 경우 땀이 나고 얼굴이 빨개지는 신체 반응을 일으킨다. 이런 과활성화된 편도체는 훈련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명상을 꾸준히 하게 되면 뇌의 마치 근육이 생기듯 과활성화된 편도체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전두엽 피질의 회백질 뉴런과 피질의 두께가 증가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모든 감정은 이유가 있고 생존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과활성화된 불안한 마음은 일상에 악영향을 준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내게 이로운 것인가를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 시선 하나로 두려움에 떠는 것은 쳐다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 좋지 않다. 진정 나를 위한다면 그런 시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덤덤하게 일상을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는 내 안에 있다.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정의하기에 달린 것이다. 내가 정의하기에 따라 지금 이곳이 안전한 공간이 될 수 있고 위험한 공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어디? 지금 내가 있는 바로 이 자리!



참조: (앱) 마음보기, (블로그) https://blog.naver.com/yogaramah/221518903001, (책) 법정스님-일기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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