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 말하지 말 것. 지시사항은 최대한 디테일하고 정확하게 입력할 것.
밖에서 잠시 바람을 쐬고 사무실로 올라왔을 때,
사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퇴사할 것처럼 소리를 지르고 다시 자리에 앉아 일을 한다는 게
내심 뻘쭘했지만,
그럴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일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그때, 띵동.
사내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대리님, 혹시 이따가 잠깐 대화하실 수 있으실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후임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아까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후임분 질문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했잖아요!]
[후임분 질문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했잖아요!]
[후임분 질문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했잖아요!]
…
..
.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까의 사태 때문에 따로 할 말이 생긴 걸까.
“그럼 이따 점심 먹으면서 얘기 나눠요.”
당사자 앞에서 당사자에 대한 불평을 하는게 아니었는데,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혹시 퇴사하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걸까.
무슨 말을 꺼낼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갔다.
“00님, 무슨 얘기하자고 부르셨어요?”
“대리님, 다름 아니라…
대리님과 약속한 걸 지키지 못했습니다.
원래 사장님께 선적 스케줄 조회 사이트 알려드리지 않기로 했는데, 저도 모르게 말씀드렸어요. 어쩌고… 저쩌고…”
듣고 보니,
내가 전날 연차로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이었다.
자기 때문에 대표랑 사수가
퇴사하네 마네 하며 대판 싸웠는데,
그깟 선적 스케줄 사이트 하나 알려줬다고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다니.
실소가 터졌다.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잠시 고민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00님, 00님은 잘하고 있지만,
사회생활의 처세술에 대해 조금 배울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윗 상사가 직속 상사에 대한 욕을 하더라도, 그걸 그대로 전할 필요는 없어요.”
이번 일이 터진 결정적인 계기는
후임이 공식적으로 전달되지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 그대로 전해오면서부터였다.
“대리님, 사장님이 저랑 대리님 업무를 바꾸는 것에 대해 제 의견을 물어보시는데요…”
물론 그 말을 듣고도
내가 가만히 참았으면 베스트였겠지만,
대표와 이미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추가 업무를 맡게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내 화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후임이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후임은
대표가 내 험담을 한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달하곤 했다.
“대리님, 대표가 왜 대리님은 전화 업무 안 하냐고 하셨어요.”
“대표님이 대리님 왜 자리 비우셨냐고 뭐라 하셨어요.”
“대표님이…”
“대표님이…”
가뜩이나
경력직이 아닌 신입을 뽑아준 것에 대해
대표에게 불만이 쌓여 있던 찰나였다.
후임을 통해 대표의 험담을 들을 때마다
그 불만은 더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누군가는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줬어야 했던 상황이었다.
그게 후임이었다면 베스트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는 그럴 판단을 할 만큼의 경험도,
여유도 없었다.
또한 그녀도 피해자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표는 면접에서 “가르쳐 줄 사수가 있으니 걱정 말라”라고 했으니까.)
그럼에도,
이 회사를 계속 다닐 생각이라면,
쿠션 역할까지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불쏘시개 역할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분명한 장점은 있었다.
한번 입력 값을 정확히 주면,
그건 정확히 지킨다는 점이었다.
“대리님,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00님한테도 버거운 상황이었을 거예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대표님과 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중간에서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자
후임은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혹시 더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때다 싶어,
업무적으로 쌓여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 역시, 나에 못지않게
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상사와 후임’이라는 역할을 내려놓고,
인간 대 인간으로,
각자 버거웠던 지난 6개월을 털어놨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