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팔뜨기래요! 사팔뜨기래요!”
짓궂은 동네 남자아이 두 명이 집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와 동생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놀려댔다. 작은 빌라 앞 한편에서 놀던 나는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야! 너네 이리 와! 가만 안 둔다!”
나는 우리를 약 올리며 부리나케 도망가는 녀석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다 아, 맞다. 뒤를 휙 돌아봤다. 동생은 혼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동생에게로 달려갔다.
“나쁜 놈들. 누나가 다음에 꼭 혼내줄게. 울지 마, 괜찮아.”
원인을 알 수 없는 사시는 동생과 우리 가족에게 재앙처럼 불쑥 찾아왔다. 아들의 한쪽 눈동자가 제자리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부모님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러다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느낀 동생의 다섯 살 생일이 지나고서야 결국 받아들였고 어머니는 딱 하루만 울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병을 고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제자리를 벗어난 동생의 눈동자를 보며 몇몇 짓궂은 아이들은 동생을 볼 때마다 놀려댔다. 어머니는 나에게 동생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나 또한 지키고 싶었다.
또다시 그 아이들이 우리의 주변을 어슬렁거릴 때면 배에 힘을 주고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거친 말로도 응수했다. 여섯 살의 까무잡잡하고 깡마른 여자아이가 목청은 얼마나 컸던지 그럴 때면 지나가는 동네 사람 모두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동생이 울 때면 나도 아팠으니까.
단지 녀석들을 물리치고 동생을 지키는 것, 동생의 눈물 앞에서 생각나는 건 그것뿐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동네의 하나뿐인 태권도 학원에 데리고 갔다. 사실은 소심하고 겁이 많은 동생만을 보내고 싶었으나 동생이 절대 혼자서는 가지 않겠다고 울기에 나를 같이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과는 다르게 울보 동생의 성격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도 도복을 입은 덕분이었을까. 마주칠 때마다 마구 놀리던 남자아이들이 내가 매섭게 째려보면 놀리던 걸 멈추고는 슬슬 뒷걸음질 치는 것이었다.
나는 더 열심히 발차기 연습을 했다. 동생은 내가 지키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만 품띠를 따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얻었다.
그랬던 동생은 감사하게도 지금 너무나도 잘살고 있다. 다섯 살과 열아홉, 두 번에 걸친 수술로 지금은 평범한 눈을 지니게 되었다. 한쪽 눈에 밴드를 붙이고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는 동생의 사진은 가족 앨범에 그대로다.
그때, 그날들.
돌이켜 보면 동생을 지켜야 했기에 힘들었고 때로는 동생 때문에 부모님께 억울하게 혼나기도 했으며 아픈 동생만 더 챙겨주는 부모님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그래도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걸을 때면 늘 혼자가 아니었다. 맞잡은 손은 나를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알 수 없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무적이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누나니까.
그리고 훌쩍 커버린 동생의 결혼식에서, 이제 울보는 내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예전처럼 함께할 수 없다는 아쉬움과 서먹해진 사이, 어린 시절의 시간은 뒤로하고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 덤덤하게 밀려왔다. 그래,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었으면. 일 년에 한두 번 얼굴 볼 일이 있었으면. 그거면 된 것이었다. 나에게 작고 소중한 아픔이었던 동생은 이제 커다란 새가 되어 훨훨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아플 일이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