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_봄은 따로 오지 않는다 20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둘째를 임신했을 때의 일이다. 어쩌면 임신 기간 중 가장 중요한 결정일지도 모를 아이 이름 짓기.
부모가 아이에게 첫 번째로 줄 수 있는 이 선물은 평생 아이를 따라다닐 것이기에 우리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이름 속엔 부모의 바람과 희망, 사랑이 함께 들어있다.
첫째가 아닌 둘째인데 짓기까지 더 오래 걸렸다. 딸이라서인지 아니면 경험해 본 일이라 더 결정하기가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에 요즘 유행하는 여자 아이 이름을 검색해 봤다. 봄이, 별이, 수아, 지수, 빛나 등등. 예쁜 한글 이름 몇 가지를 적어 놓고 며칠을 남편과 열띤 토론을 했다. 이름도 중요하지만 뜻도 중요하기에 마음에 드는 이유와 의미까지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아이가 나중에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우리가 처음으로 아이에게 주는 선물인데 좋아해야 할 텐데. 나중에 커서 이름 바꾸는 일도 꽤나 복잡한 일이고 말이야. 우리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정말 좋아했으면 좋겠어. 또 이름 따라간다는 말이 있잖아. 이름이 아이 성격이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어."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나처럼은 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언제나 양보하는 것이 마음 편한 나.
누가 칭찬하면 받아들이기 힘든 나.
늘 부족하고 못난 것만 같은 나.
무엇이든 확실히 결정하는 것이 어려운 나.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나.
가족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나.
스스로를 겁이 많은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라 단정 짓는 나.
자신감이 부족하지만 넘치는 척하며 낯을 가리지만 상대와 어색할까 먼저 말을 걸고 밝은 척, 씩씩한 척하는 나.
집에 돌아오면 방 불을 끄고 있는 것이 좋은 나.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사람을 믿지 않는 나.
항상 외로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나.
"그럼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우리 딸이 어떤 사람이길 바라?"
남편이 물었다.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하고 아낄 줄 알았으면 좋겠어. 배려도 당연히 해야 하지만 어디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알고, 남들 눈치 많이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 있으면 하고, 즐기고, 해외여행도 많이 다니면 좋겠어. 결혼은 꼭 늦게 하거나 안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아. 이 십대를 나처럼 육아로 다 보내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행복이 무엇인지 알며 살았으면 좋겠어. 본인의 인생을 즐기며 살 줄 아는 사람. 나처럼 너무 상대의 입장만 생각하지 않고 자기 실속은 챙길 줄 아는 사람. 환불도 잘 했으면 좋겠어. 하하"
남편은 내가 운전할 때마다 이야기한다. 제발 양보 좀 그만하라고.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비켜줘야 하는 상황임에도 내가 양보해 주다 차를 긁은 적이 있기에.
그래서 우리 딸은 배려도 양보도 좋지만 자신의 실속을 먼저 챙기고 어디서나 하고 싶은 일 하며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사실은 건강하기만 해도 감사하지만 말이다. 나의 작지만 큰 바람이랄까.
"그럼 이거 어때? 이 세상의 중심은 나."
듣는 순간 머리가 번쩍했다. 이거다 싶었다.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뜻이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그런 아이. 혼자여도 함께여도 외롭지 않고, 작은 행복에도 커다란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아이. 사랑을 줄줄 알고 받을 줄도 알며 어디서나 당당한 그런 아이. 자신감 넘치는 아이. 이 세상의 중심은 나.
며칠 전 내가 머리를 감고 있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응가가 마렵다며 화장실로 들어왔다.
"응, 하고 있어. 엄마가 얼른 머리 감고 닦아 줄게. 잠깐만."
그러자 아이는 응가를 하고 생각하다 대답했다.
"아니야, 엄마. 천천히 씻어."
"아니야, 괜찮아. 엄마 거의 다했어. 다하면 말해~"
"아니야, 엄마. 천천히 해. 아니다, 나 아직 응가 다 안 나왔어!"
아이가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마음이 쿡하고 시큰거렸다. 분명 이름 따라간다고 했는데.
내가 양보를 강요한 적이 있었던가? 아닌 것 같은데, 또 내 잘못같다.
본인도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들텐데.
너무 예쁘지만 마음이 쓰렸다.
"이쁜 딸.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래도 불편한 거 있음 이야기 해. 사랑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아직 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충분히 내 마음을 설명해 주기란 어려운 일일 테니 말이다.
한번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엄마, 친구가 사탕을 가져와서 나눠줬는데, 다른 친구가 그거 안 좋아한다고 안 먹는다고 떼썼어. 그러면 안 되는데. 가져온 친구가 속상하잖아."
"응, 그랬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구나."
아이에게 사람마다 생각이 달라서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당당하라고 이름 지었는데 변두리의 마음까지도 알아채는 아이.
가끔 나를 너무 닮아 슬플 때가 있다.
아이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엄마, 아빠의 우주에서는 너희가 중심이란다.
그러니 조금은 내 마음 먼저 챙겨도 괜찮은 세상이라는 걸 기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