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나에게 한 말이다. 몇 번의 연애 실패 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방에서 뒹굴뒹굴하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상이 험한데 딸이 이상한 남자를 만날까 봐 걱정된 건지, 아니면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서 딸에게 이야기 할 정도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잘생겼어?” 괜히 툴툴대며 물었다.
“... 키는 커.”
“그럼 됐어. 안만나.”
그래도 사람 잘 보는 아빠가 딸에게 이야기 할 정도라면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아빠는 같은 부대에서 일하는 하사인데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너무 착하고 일도 성실하게 하고 똑똑하다고 늘 칭찬을 했다.
어느 날, 아빠는 친한 후배들과 술을 먹는데 집 근처라고 엄마에게 올 생각이 있냐며 연락을 했다. 엄마도 몇 번 같이 자리한 적이 있는지 가겠다고 했는데, 기어이 나를 끌고 나가는 것이었다.
안 간다는데도 옷은 이게 좋겠다며 딸의 옷까지 치장해 주며 억지로 끌고 갔다.
그 자리에는 아빠가 말한 그 하사도 있었다.
술이 약한 분인지 잔뜩 취해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우리가 도착하자 안간힘을 내 눈을 부릅뜨고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멀뚱히 있다 치킨 몇 조각 먹고 얼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히 가세요.”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중간이 어떻게 되었냐면, 얼굴이 나쁘진 않네라고 생각한 내가 먼저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했고, 신청을 수락한 남편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잘 들어 가셨어요?’ 라고 말이다.
남편의 말로는 그날 술자리에서 나를 처음 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지난날 아빠 차를 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걸어가는 나를 보았다고 했다. 난 아빠가 차를 멈추고 나에게 인사했고, 차에는 여러 명의 군인들이 있었다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날 내가 예뻤다고 했다. 참나. 계획적이었고만.
당시 내가 일하던 곳에 네 명의 남자가 나에게 연락처를 물었고 남편은 자신까지 5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나의 손을 잡았다.
남편은 내가 당신의 첫사랑이라고 했다. 믿거나 말거나.
손 한번 잡는 것도 떨리고 말 한마디도 조심스럽게 했던 이인데. 모든 게 처음이라던 그는 순수해 보였고 웃는 것이 참 예뻤는데.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는 모습이 좋았는데.
강산이 변하니 남편도 변했다.
알고 보니 타고남과 말씀에는 서리가 서렸고 미각이 셰프급인 바닷가 남자 그이는 하필 마음에 없는 소리는 못하는 성격이라, 저녁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맛이 없으면 의도와 다르게 티가 굉장히 난다.
제발 엄마 이리 와서 놀아달라고 하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달래며 밥을 준비하는 나. 정신을 딴 데 두고 요리를 하니 종종 음식이 타고 간도 제대로 안 맞을 때가 있다.
남편은 식사를 드시며, 국은 반 이상이나 남겼고 반찬도 깨작깨작했다. 늘 먹는 반찬 반, 버리는 반찬 반이다. 내가 요리를 못해서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중간은 한다고 생각한다. 밥을 싹싹 먹는 첫째와 국이 너무 맛있다며 두 그릇째 원샷을 하는 둘째를 보면 말이다.
“왜, 별로 맛이 없어?” 기분 나쁠까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근데 난 콩나물국은 짭쪼름한 게 좋아.”
“...”
속에서는 부글부글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인데 눈치는 심각하게 없어서 내 속을 모르는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씻으러 화장실로 향한다. 그런 아빠에게 둘째가 출동한다.
“엄마! 콩나물국 맛있어! 아빠도 콩나물국 맛있었지? 나는 두 그릇 먹었어!” “응, 아빠도 맛있더라.”
남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웃기시네.”
내 말에 더 약 올리듯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한다. 노래를 틀고 씻는단다.
그런데 나오는 노래들이 죄다 여자 아이돌 노래다. 오늘따라 왜 저런담.
“어휴, 하필 왜 다 여자 아이돌 노래야.” 설거지를 하며 하는 혼잣말을 둘째가 또 듣고 아빠에게 출동한다.
화장실 문을 벌컥! “아빠!!! 엄마 사랑하지? 왜 여자 아이돌 노래만 들어? 아빠 그 가수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듣는거야?”
“응~ 그럼~ 우리 딸 잘 아네~”
“엄마!!! 아빠가 엄마 사랑한대!!!”
눈물겨운 둘째의 노력에 고맙다고 대답하고 나는 묵묵히 설거지를 한다.
어느 날, 첫째가 물었다.
“엄마, 얌체같다가 무슨 말이야? 책에서 봤어.”
“응, 얄밉다는 뜻이야. 예를 들면 엄마는 계속 집안일하고 있는데 아빠는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 게임 하지? 그럴 때 엄마가 아빠한테 얌체같다고 할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