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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May 16. 2023

'어떤' 비민주적 소설의 꿈

230516

  "단편소설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한 포인트를 융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불쑥 솟은 한순간 아래 모든 문장과 장면이 깔리게 되는 거죠. 좀 비민주적이지 않아요?"
  "너를 어쩌면 좋니."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 이미상,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소설의 마지막 시퀀스에 해당하는 대목을 읽다 낄낄 웃었다. 고모 상중에 들른 카페에서 주인공 목경이 두 여자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이다. 내 웃음은 동생이 한심한 듯, 못내 귀여워 웃는 언니와는 좀 다른 감각이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은 소설의 시작점부터 등장한다. 한 명 일행이 더 있는데, 그 여자는 둘의 대화엔 딱히 끼지 않은 채 물건을 옮기느라 바쁘다. 비닐봉지를 쓰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녔다나. 동생의 말이 꼭 작가 이미상의 '소설론' 같았다. 좋은 서사는 '민주적' 서사라는 지향이랄까.

  결을 달리해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민주적 서사는 가능한가? 전자가 서사는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당위라면, 후자는 존재의 문제다. 가능론자라면 후자를 역량의 함수로 치환하겠으나, 글쎄. 탈중심화니 포스트모던이니 다성성이니 요란한 형식실험 가운데 성공한 서사는 많이 들어본 적 없다.



  소설은 카페를 찾은 무경이 두 여자의 대화를 듣다가 생전의 고모, 언니 무경과 함께 떠났던 모험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액자식 구성으로, 함께 산행을 떠났던 이들은 저녁 무렵 고모가 엽총을 잃어버리며 위기를 맞는다. 우연히 만난 사냥꾼 남성들에게 기대려했지만, 그들'재미' 운운하며 고모와 목경, 무경을 은연 중 겁박한다.

  고모는 불쾌하지만, 야생동물이 있을지 모르는 산중을 조카들과 함께 헤매고 싶지 않아 인내한다. 그러던 중 무경이 사라지며 상황이 반전한다. 고모는 수색을 위해 사냥꾼들과 헤어지고, 원치 않던 야밤 산행을 거쳐 오전 아파트 단지에서 무경을 찾아낸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 어렵게 만난 무경의 말에, 어쩐지 고모동질감을 느끼는 표정이다. 고모를 좋아하다 못해 "하루에 한 번은 고모와 놀다가 흥분해 토했다"는 목경으로선 질투가 나는 장면이다. 먼 훗날의 목경은 소설 운운하는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동생의 말을 따다 자기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특히 불쑥 솟은 한순간과, 그 아래 깔린 시시한 것들에 대해. '한 방'이 지닌 특권에 대해." 그리고 아래 문단이 이어진다.


  고모가 언니를 딸로 임명했을 때 목경은 무엇보다 분했다. 고모를 사랑한 것은 자신이었다. 고모와 시간을 보낸 것은 자신이었다. 고모와 살을 비비고 땀을 핥은 것은 언니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순간 깊이 닿았고, 고모가 죽기 직전 떠올릴 한순간을 골라야 했다면 언니와의 기억을 택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분한가!
  그러나 목경은 또한 알고 있었다. 어떤 기억은 통으로 온다. 가슴을 빠개며 기억의 방이 통째로 들어온다.


  기억은 '한 방'도 아니고, 그 아래 깔린 '시시한 것들'도 아니다. 통으로도 온다. '어떤'이라는 한정사는 중요해 보인다. '모든'이라고 적든 그렇지 않든, 예외의 잠재성을 염두하지 않는 태도에 맞서기 때문이다. 기억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랄까. 기억을 서사로 바꾼다면, '민주적'이란 형용의 유효성을 이같은 반발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이미상이 민주적 서사 구성에 실패했대도 별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동생은 언니에게 "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을 찜찜해한다"고 말하는데, 이 '찜찜하다'는 감각 정도가 적절한 것 같다. 결국 '우뚝 선 한순간'을 만들고 말았지만 '지지'하지는 않았다. '시시한 것들' 만으로 내용을 채우지 않았지만 외면하지도 않았다. 일종의 메타소설을 경유해 그는 '어떤' 비민주적 서사는 민주적 서사를 꿈꾼다는 증거를 남겼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심사평에 이렇게 쓴다.


  이미상의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이 이상한 소설이 아니라고 믿는 것 같은 이야기를 유심히 들었는데(읽었는데) 놀랍게도 모두 자기 식대로 이 소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이상한 소설이 맞을 것이다. 이건 결함 아닌가? 그러나 이 소설은 힘이 세서 그런 물음표들을 다 쓸어버린다. 지면이 좁으니 첫 챕터 이야기만 하자(나는 이 소설이 첫 챕터만으로도 이 책에 수록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두 인물의 대화 도중 제삼의 인물이, 그 기괴한 미장센과 함께 툭 튀어나온다. 이런 '제삼의 무엇'이 이미상 소설의 구조에는 있다. 아이코닉한 형상이라고 해야할 그 인물은, 정의로운 것과 우스꽝스러운 것, 순수한 것과 짜증나는 것 사이 어딘가에 서서는, 이런 특질들 사이에는 아주 얇은 막밖에 없어서 서로를 알아본다고(즉, 섞이는 지점이 있다고) 자기희생적으로 웅변한다. 작가는 두 진영(?) 중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모두가 그를 자기편이라고 믿게 만든다. 좀 잊고 산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게 소설 아닌가. 이 소설을 대상으로 안 뽑을 수는 없을까 고민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 심사위원이 뽑은 게 아니다. 이 소설이 자기를 뽑은 것이다. - 신형철, <2023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심사평


  '제삼의 무엇'을 쫓는 일은 언제나 버겁다. 나는 '야마'에 종속되는 기사쓰기 관행을 생각한다(그러고 보니 '우뚝 선'이라는 묘사와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가 어째 필연적 관계처럼 느껴진다). 기자로서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민주적 기사는 가능한가.

  "한 소설 안에서 모든 가능성이 실현될 수 없으므로 다음번에 또다시 도전해봐야 하겠지요. 한계가 곧 개성이다, 언제나 힘이 되는 주문입니다." 이미상이 작가노트에 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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