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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Nov 27. 2022

첫 독서노트 - <분노>

221127

  독서 노트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기억에 의존했으나, 앞으로는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지금은 괜찮다. 다만 앞으로의 나를 믿기 어려운 것이다.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책읽기로 보내면서 죽기 전 무엇을 지나왔는지 떠올릴 수 없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봤다. 비참할까, 슬플까. 어쩌면 아무렇지 않을 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거니까- 싶다가 그렇지 않을 거란 결론에 이르렀다. 무언가 읽었다는 감각만은 여전할 테니.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분노>.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책을 꺼내 찍었다.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분노>를 읽고 있다. 2권 분량이지만 줄 간격이 커 내용이 길지 않다. 요시다 특유의 간결한 행동 묘사와 툭 치고 들어오는 심리 서술 덕에 읽기도 편하다. 거기에 이런 첫문장 뭐랄까, 사술보다 강렬하게 더 사람을 홀리고 빨아들인다.


"범행 후, 남자는 여섯 시간이나 현장에 머물렀고, 대부분의 시간은 알몸으로 지냈다."


  살인 사건의 배경은 도쿄 하치오지 교외. 피해자는 오기 유키노리-리카코 부부이며, 범인은 야마가미 가즈야라는 84년생 남성이다. 현장에는 '분노'라는 글자가 피해자의 피로 쓰였다.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후더닛' 소설과 차이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후더닛스러운 긴장감은 그대로 갖는다. 사건 현장에서 도망친 야마가미는 정체를 숨긴 채 일본 열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등장인물 중 누가 야마가미인지 추측하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요시다는 세 지역의 각기 다른 인물들을 재빨리 소개한다. 하나는 마키 요헤이라는 중년 남성과 그의 딸 아이코. 하마사키 항구마을에 사는 요헤이는 가출한 딸 아이코를 도쿄의 사창가에서 찾아 고향 마을로 데려간다. 마이코는 학창시절 바람을 피워 친구들 사이에서 나쁜 소문에 휘말린 적이 있다. 통통한 그녀는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 휘둘린 것처럼 보이는데, 친구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외려 자신을 방기한다. 마치 사랑받을 수 없을까 두려워 확실히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바닷마을에 다시로라는 이름의 청년이 찾아오고 요헤이의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아이코는 점점 다시로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다른 인물은 후지타 유마. 도쿄 신주쿠 텐바(동성애 지향의 남성들이 만남을 갖는 장소. 사우나인 경우가 많다)에서 나오토라는 이름의 남성과 관계를 맺고 이후 동거한다. 나오토가 어디에 살며 무엇을 하다 이곳에 흘러왔는지는 몰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병상의 어머니, 자신의 성적 지향을 모르는 형제에게까지 소개시켜줄 만큼 깊은 관계에 이른다. 오키나와의 학생 이즈미도 주요 인물이다. 엄마와 펜션 '하루마의 파도'를 운영하던 그녀는 친구 다쓰야와 함께 인근 무인도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다나카라는 떠돌이 남성을 만나게 되고 어쩐지 신경쓰여 도시락도 갖다 주는 사이가 된다.

  요시다의 서술 스타일이 이 장르에 특히 잘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요시다는 인물 한명 한명의 서사를 차분히 보여주지 않고 교차하도록 쓴다. A에게 벌어진 작은 사건 하나 뒷편에 막바로 B가 차를 마시는 장면을 배치하는 식이다. A 이야기가 책 페이지로 서너장, B 이야기가 네댓장에 그칠 만큼 빠르게 인물 상황을 교대할 때도 있다. <퍼레이드> <요노스케 이야기>에선 이것이 인물 각각의 일상과 기억을 감정적으로 묶어내는 장치였다면, <분노>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로 기능한다. 도쿄-하마사키-오키나와 지역을 정신없이 오가며 독자는 나오토-다시로-다나카 중 누가 범인인지 궁금해진다.

  등장인물들에게 '시간'을 균등분배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 각지의 인물들은 나오토 등 낯선 인물들과의 만남을 호의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점차 야마가미를 추적하는 수사와 매스컴 보도가 이어지고, 인물 묘사가 상세해지면서 '저 사람 공개수배된 그 사람과 닮았어'라는 의문이 주변인의 마음에 깃든다. 책장을 넘어가는 시간을 따라 의심이 깊어지고, 각 인물들이 자리한 공간을 따라 의심이 넓어지는 구조다. 역설적이지만 그 시간은 의심스러운 인물을 향한 주변인들의 애정과 그들 사이의 추억이 진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누가 범인이냐고? <분노> 2권 말미에 번역가 이영미씨는 요시다의 인터뷰 일부를 인용해 뒀다.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나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2년 반에 걸친 그의 도주 행보나 사건 자체보다는 공개수사 후에 물밀듯이 밀려든 수많은 제보 쪽에 더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길에서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정도라면 몰라도 자기와 친밀한 사람까지 의심하게 되는 ‘사건의 원경(遠境)’에 마음이 어수선하고 술렁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새삼 아이코의 이야기를 작가가 책 앞머리에 배치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혹시나 다시로가 범인이면 어쩌나, 아이코가 또다시 불행에 빠져들면 어떻게 하나 독자들이 근심하도록 만들려는 시도였을까. 영리한 선택이었다. 끝내 다시로를 의심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잃을 뻔 하고, 되찾거나 붙잡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변인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밤에는 책을 마저 읽고, 가능하면 이상일 감독의 소설 원작 영화 <분노>를 찾아 볼 생각이다.


  쿠키 1. 형사 기타미가 첫 용의자를 불심검문하는 목욕탕 장면이 꽤 흥미로웠다. 형사가 '범인 같은 사람이 있다'는 제보를 받고 목욕탕으로 출동하는 장면 바로 다음에 유마와 나오토가 목욕탕에 가는 장면을 삽입해 당연히 같은 목욕탕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만든다. 영화 같은 연출 방식이다. 어쩌면 영화가 대중문화의 첫머리를 차지한 세대의 당연한 서술방식이려나.


  쿠키 2. 유마가 어머니와의 추억을 되새기는 장면도 좋았다. 몇 문장으로 사람 마음을 이토록 뭉클하게 만드는 것, 정말 대단한 재주다.

  [어머니가 죽는다. 어머니가 죽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그 순간 불현듯 옛날의 광경이 떠올랐다.

  프라이팬에 불이 옮겨 붙었다. 불길이 높이 치솟았다. 옛날에 가족이 함께 살았던 아파트의 비좁은 부엌이었다. 아직 초등학생이던 형이 뭔가를 만드는 중이었다. 불을 본 어머니가 옆방에서 튀어나와 형의 손에서 프라이팬을 낚아챘다. 멍하니 서있는 형을 "저리 비켜!"라며 힘껏 밀쳐내고 손바닥으로 프라이팬의 불을 두들겼다. 어머리의 머리칼이 타는 냄새가 닜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프라이팬의 불을 두들겼다. "가까이 오면 안 돼! 가까이 오면 안 돼!"라고 외치며

  어머니는 아직 한창 젊었다.

  왜 이런 순간이 까맣게 잊어버렸던 기억이 되살아날까.

  유마는 움켜쥐고 있던 휴대전화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로 온다며?조심해라." 곧바로 전화를 받은 형이 말했다. 나오토가 벌써 연락을 한 듯했다.

  "형, 그 불 어떻게 됐지?" 유마가 물었다.

  "그 불? 여보세요?"

  "아냐, 됐어⋯. 저어, 혹시⋯ 혹시 내가 늦으면⋯."

  오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옛날, 어머니는 꺼질 리가 없는데도 필사적으로 불길을 두드렸다.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불길은 더 높이 솟구쳤다.

  "혹시 늦으면, 내가 어머니에게 꼭 전할게."

  귓가에 형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뭐라고?" 유마가 무심코 물었다. 그리고 혹시 늦지 않게 도착하면, 자기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후 어머니는 불에 탄 머리칼을 가위로 잘랐다. 오른손에는 애처롭게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불을 껐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마웠다고 전할게."

  귓가에 또다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다는 말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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