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Dec 02. 2022

더 슬프지만 더 견딜만하다

221130

  지난 달 초 교토 여행이 기억난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벌어진 지 불과 며칠 뒤인 시점이었다. 때가 좋지 않았으나, 미리 잡아둔 휴가 일정이라 바꾸기 어려웠다. 간사이 공항에 내리자마자 신문을 샀다. 1면 톱뉴스가 이태원 참사였다.



  카페와 술집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꼭 이태원 얘길 꺼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고마웠지만 특별히 말을 더하기 어려웠다.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일본어는 제한적이었고,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엔 잘 알지 못했다. 잘 해결되기를, 남은 이들이 더 슬플 일은 벌어지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여행 중 읽으려 들고 간 신형철 평론가의 신간 <인생의 역사>에 이런 글이 있었다.


  "이런 말을 덧붙이자.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죽기 위해 사는 법>, 78쪽)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194쪽)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 이유」


  숱한 죽음이 있었지만, 아직도 나는 '죽음을 세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 몇날며칠 국회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한 나라를 움직이는 이들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실은 세는 법을 알고 싶기나 할까 싶다. 이 공동체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잃었나. 156명이란 숫자로는 결코 셈할 수 없는 세계가 사라졌다. 어쩌면 내가 알았을, 알게 됐을지도 모르는. 


---



  이틀 뒤 학준과 오랜만에 책모임을 하기로 했다. 그때 얘기 나누기로 한 책이 신형철의 글에 등장하는 <나란 무엇인가>이다. 교토에서 돌아오자 마자 사서 읽었으므로 슥 다시 봤다. 다만 이 책의 발문까지 신형철이 썼다는 사실을 적어둔다. 얼마나 큰 애정인가.

  요약이 꽤 좋아 옮겨둔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런 발상은 어째서 신선한가. 위에서 말한대로 ‘개인’이라는 관념에는 육체와 마찬가지로 인격도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데, 문제는 ‘나눌 수 없는’ 것이야말로 (도덕적으로가 아니라 화학적으로) ‘순수한’ 것이라는 식의 발상이다. 더 쪼갤 수 있다면 그것은 ‘불순한’ 혼합물이다. 그래서 더는 쪼갤 수 없는 순수 실체로서의 인격을 우리는 ‘진정한 나’라고 부른다. 그러나 히라노는 ‘진정한 나’라는 관념이 일종의 “신화”라고 못박는다. ... ‘진정한 나’라는 관념은 우리를 ‘진짜와 가짜’라는 프레임 속에 포박해버린다.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친구를 만날 때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는데 만약 한쪽이 진짜고 다른 한쪽이 가짜라면 결국 나는 위선적인 인간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처럼 진정한 나를 찾지 못했다는 상실감과 진정한 나로 살고 있지 않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히라노의 주장은 해방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분인주의는 ‘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철저하게 타인과의 관련 속에서(만) 사유하는 관점이다. 그래서 분인주의 시각에서 보면 나의 모든 분인은 특정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 것이니까, 부정적 분인도 절반은 타자 탓이고 긍정적 분인도 절반은 타자 덕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특별히 비굴해질 필요도 또 오만해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를 이런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 역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타인도 온전하게 알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그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한 분인으로서의 그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가 ‘근본적으로’ 호는 ‘본질적으로’ 좋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단적할 수가 없다. 하나의 분인만 보고 한 인간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폭력이기 때문에 오류이기 때문일 것이다.”


  신형철은 쓰지 않았지만, 히라노가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서술한 대목도 훌륭하다. 환경이 바뀌고 관계맺는 상대가 달라지면 분인은 변한다. 혼자 있을 때의 나는? 그 시기 가장 큰 분인의 영향 아래 다른 분인들과 대화하는 존재이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로 인한 상실이 왜 그토록 큰 고통이 되는가는 앞서 이미 인용했다. 히라노는 관계의 또다른 극단으로 사랑을 설명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분인주의적 연애관”은 다음과 같이 묻는다. “지금 사귀는 상대가 정말로 좋은지 어떤지 혼란스러울 때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내가 좋은가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랑은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는 냉소적인 지혜의 반복이 아니다. 어떻게 사랑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리다.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You complete me”(제리 맥과이어),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등 영화 속 숱한 명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대사들이 기똥찬 이유는 주어가 I 말고 You라는 데에 있다. 관계 파탄의 책임은 내게, 성공의 원인은 상대에게 주는 성숙한 인간관이다.

  어쩌면 내게 고통이었던 그/그녀도 상대가 나였기에 그러했으리라는 가능성, 히라노가 주는 상처이자 구원이다.


*후기 : 학준이 글을 읽고 이런 카톡을 보냈다. "조커 : You complete me (Batman)." 형,  아니야...

매거진의 이전글 마라맛 연애 버라이어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