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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03. 2022

살며 읽으면, 읽으며 살면

221202

  한승혜 작가의 <저도 소설은 어렵습니다만>을 '밀리의 서재'로 틈틈이 봤다. 정기구독을 신청한 게 몇달째더라. 돈은 꽤 냈는데 읽은 책은 별로 없다. 독서노트 기능을 활용해 메모를 남긴 책 리스트를 보니 총 8권. 로이터 사진기자 김경훈의 <사진을 읽어드립니다>, 기자 출신 언론학자 지오바나 델 오토의 <AP, 역사의 목격자들>, 영문학자 조셉 윌리엄스의 <스타일 레슨>이 기억에 남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 <가든 파티>도. 나머지 책은 그저 킬링타임용이었다는 뜻이다. 맨스필드 책은 종이로도 여러 번 봤으니 모바일 어플로 봤다고 말하는 건 좀 무리려나.

  메모하지 않고 읽은 책도 꽤 있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안난다. 물성을 지닌 종이책은 내용까진 기억 못해도 읽었다는 사실과 좋다, 나쁘다는 인상 정도는 떠오르는데. 대부분은 중간쯤 읽다 말았는지, 끝까지 다 봤는지도 기억이 난다. 블로그로 읽은 여행 후기와 직접 발품판 여행 경험의 차이 같은 걸까. 정보만 취한다면 ebook도 나쁘지 않은 듯한데, 독서 경험으로선 아무래도 종이 쪽이 압도적인 듯하다. 어쩌면 내가 종이 텍스트의 헤게모니 속에 살아온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 걸지도.

  그런 것 치고 한 작가의 책은 꽤 오래 기억날 거란 예감이 든다. 소설 서평집인데, 책 내용의 요약보다 '왜 이 책이 흥미로웠는지'를 서술한 것이 좋았다. 특정 책을 읽을 때 자신의 마음 상태라거나.



  "3월의 나는 도무지 나란 사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너무 성급한 나. 조급한 나. 나약한 나. 연약한 나. 친절한 사람에게 나 자신의 순간적인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함부로 대해버린 나. 어떻게든 관심을 얻고 싶은 마음에 비굴하게 행동해버린 나. 무엇도 믿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나. 한편으로는 너무 쉽게 마음을 주는 나. 너무 쉽게 타인을 깎아내리는 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버리는 나. 충동적인 나. 너무 많은 말. 너무 성급한 행동. 작은 호의를 큰 마음으로 오해한 것. 타인에게 지나치게 기대려 한 것. 너무 많은 것을 멋대로 기대하고 서둘러 실망한 것. 그 밖에 수없이 많은 한심한 나. ...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넌 싫어하는 게 왜 그렇게 많아?” 그 말을 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고, 결국 삶에서 밀어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서 용서할 수 없었다. 3월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엉망인지를 깨닫는 기분이었다. 연기에 무척이나 서툰 배우가 된 느낌. 실수를 연발하고 헛발질을 하고 누가 봐도 진실되어 보이지 않는 가짜 연기를 하는 사람. 어떨 때는 마냥 형편없는 사람 같았고, 또 다른 때는 나의 어설픔과 경박함을 남들이 꿰뚫어 볼까 두려웠다. 때로는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 <내가 되는 꿈> 소개


  어떤 책이 좋은 이유를 책의 외부에서 찾는 태도가 용감해 보였다. 누구나 서평을 쓸 때는 객관적이길 바라지 않나. 나라는 개인에게 이 책이 왜 좋았는지, SNS가 아닌 출판의 영역에서 내비치는 건 쉽지 않은 일 같았다. 그러면서도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은 작가의 역량일텐데, 한 작가는 이 어려운 일을 꽤 능숙하게 해낸다. 좋은 서평가인 것이겠지.

  아마도 작가로서의 감각과 세월을 통해 쌓인 경험이 화학적으로 결합된 결과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이 맺는 관계와 그 안에서 생기는 균열, 내면의 상처, 극복, 그럼에도 남기는 트라우마 같은 것들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살아온 삶에서도 찾아내 언어화하는 재능. 아래와 같은 문장이 아마도 그 결과물일 게다.


  "그다지 윤리적인 사람이 되지 못함에도 사는 동안 흔히 말하는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적이 별로 없는데, 이러한 까닭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도둑질을 시작하고 발각되었던 경험을 통해 스스로가 중독에 매우 취약하며 무언가를 쉽게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에, 한번 시작하면 멈추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로 그만두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그렇기 때문에 늘 이성의 끈을 가까스로 붙들며 살아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반듯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모두 안간힘을 쓰며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 <종이달> 소개


  "사람은 절망이 너무 커지면, 모든 것을 돌이키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행동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 절망감을 잠시라도 없애기 위해서. 언젠가 잡힐 것이 뻔한 범죄자로서의 암울한 미래는 모두 잊고 지금 당장 터지는 샴페인과 호화로운 서비스를 누리며 잠시 잠깐이라도 착각에 빠지고픈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 <종이달> 소개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스스로의 모순을 깨달았다. 나를 비롯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무지하길 바라는 나도 모르던 내 마음. 많은 이들에게 무지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이라 외치면서도, 정작 나와 가까운 이들은 내내 무지하길 바라는, 세상의 쓴맛 따위에 노출되지 않고 계속해서 모르길 바라는, 그럼으로써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나의 시시한 마음." - <음복> 소개


  "무엇이 진실이냐를 넘어서 진실의 윤리, 그러니까 진실이 늘 바람직한지에 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 <나를 보내지 마> 소개


  "A가 나에게 한 말과 행동, 내가 A에게 보인 호감과 열망을 생각할 때마다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이 성폭력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분명 그렇게 말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A가 나를 협박했는가? 아니오. A가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했는가? 아니오. A가 나를 만졌는가? 아니오. 그렇다면 A가 나를 존중해주었는가? 아니오. A의 행동이 정당했는가? 아니오. A와의 만남에 어떠한 문제도 없는가? 역시나 아니오. 이때의 상황에 대해 누군가 윤리적이냐고 묻는다면 분명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A를 떠올릴 때마다 오래도록 화가 났다. 마주치면 욕을 퍼붓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욱 싫은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나 자신을 그런 상황에 처하게끔 만들었다는 사실이, 내가 나를 취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내가 나를 너무도 무방비한 상태로 놔두었다는 것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나.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과 특별해지고 싶은 열망과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를 조절하지 못해 내가 나를 ‘낭비했다’는 사실을 참기가 버거웠다." - <조명등 아래서 보낸 시간들> 소개


  "너’는 일상에서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을 만큼 섬세하게 마음을 쓰지만, 동시에 마음을 지나치게 쓰는 까닭에 공과 사, 일과 생활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편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라 그런 ‘너’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이 망가지는 것에는 무심한 사람이며, 환경과 인간을 고려한 ‘윤리적’으로 생산된 제품만을 고집하느라 정작 그것을 사 오는 과정에 수반되는 나의 수고와 피로에는 무신경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목소리는 무시하는 너라는 존재." - <너라는 생활> 소개


  그리하여 한 작가가 내놓는 결론은 뜻밖의 것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것은 소설의 작가가 예비했으나 글로는 쓰지 않은, 소설 바깥에 존재하는 인생의 진실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어른이 된 태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하지만 아마 멀지 않은 시기에 미래의 나는 다시 한번 울 것이고, 소설 속 태희의 결심과는 다르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이유로 울고 있을 확률이 높다." - <내가 되는 꿈> 소개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자체가 훌륭하다고 느끼는 요즘이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감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긴 시간 읽으며 살다보면 조금은 삶을 이해하게 될까. 어쩌면 그것이 소설을 읽는 이유일는지 모른다고, 한 작가의 책을 읽으며 새삼 생각했다. 남의 감상을 엿보는 일의 효용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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