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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04. 2022

절망의 예감

221204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카페에서 <금테 안경>을 읽었다. 단 것이 땡겨 집근처 던킨 도너츠를 찾았는데 휴무일이었다. 네이버엔 영업 중으로 뜨던데. 대신 커피빈에서 크림치즈 머핀을 먹었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 던킨에 갔어도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크리스피 크림, 그것도 오리지널 글레이즈드 말고 글레이즈드 사워크림 정도는 돼야 했다. 왜 내 자취방은 '크세권'이 아니란 말입니까.



  저자 조르조 바사니는 '페라라의 소설가'로 불린다고 한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 페라라에서 보낸 뒤, 그때의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썼다나. 페라라 인근 대도시 볼로냐에서 태어나 볼로냐 대학 문학부에서 수학했지만, 문학적 원풍경은 어린 시절 형성된 모양이다. 몇 권 안되는 그의 소설 대부분이 페라라를 배경으로 한다니, 말 다 했다.

  소설의 화자는 갓 대학에 입학한 청년 '나'다. 바사니가 인물들의 나이를 정확히 적어두지는 않았지만 아래 문장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936년 끝자락의 상황을 묘사한 문장이다.


"운전사 옆에 붙어서 속도를 내라 재촉하는 이들은 대부분 신입생이었다. 바로 그해 정치학과에 입학했지만 이미 상급생처럼 태연하고 냉정하게 행동했던 에랄도 델릴리에르스를 비롯한 나머지 우리는 모두 여섯시 오십분 완행열차가 우리를 태우기 전에는 절대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시작해 1937년 끝자락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의미심장하다. 유대인인 '나'는 파시스트 정권 치하 이탈리아에서 인종차별의 조짐을 느끼는데, 바사니는 이탈리아에 인종법이 본격 도입된 1938년을 앞두고 돌연 이야기를 마감한다. 전면화된 차별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라는듯. 소설 첫머리, '나'가 기억하는 파디가티의 페라라 이주 시점은 1919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점이자, 무솔리니가 '검은 셔츠단'을 조직한 해. 해방과 동시에 깃든 불길한 시대의 초입.

  1인칭 관찰자 시점 선택이 현명하다. 유대인인 '나'가 관찰하는 파디가티는 동성애자다. 성공한 의사가 성적 지향을 이유로 손가락질 받게 되는 과정을 '나'는 지켜본다. 동시에 독일의 유대인 학살 사실을 익히 아는 '나'는 이탈리아에서 차별이 시작될 조짐을 느낀다. 차별의 이유는 다르지만, 현상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파디가티의 존재로 '나'의 불안은 결코 막연할 수 없다. 친구 니노는 "난 믿지 않아. 지금 상황이야 이렇지만, 이탈리아가 너희 민족에게 독일과 똑같은 입장을 취할 거라고는 믿지 않아. 결국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될 거야"라고 말하지만 '나'는 냉소한다.


"니노가 한 말을 고맙게 여겨야 마땅했을 것이다. 결국 그가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그의 말, 특히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망적인 어조가 유발하는 불쾌감을 간신히 숨길 수 있었다."


  소설은 공간을 따라 진행된다. 페라라, 볼로냐, 리초네, 그리고 다시 페라라. 파디가티를 향한 공동체의 차별이 동선을 따라 심화하는 구조다. 어린 시절엔 동네 풍문에 그쳤던 파디가티의 성적 지향은 볼로냐에서 '나'와 친구들에게 알려진다. 휴양지로 찾은 리초네는 파디가티의 동성애가 널리 알려지는 장소다. '나'의 친구인 미남자 델릴리에르스와의 동행이 소문에 실체를 부여했다. 리초네에서 시달린 휴가를 마치고 페라라에 돌아왔을 때, 파디가티는 더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요컨대 이야기의 전환점이다. 주변의 지탄도 문제이지만, 그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인가가 변화했다.


  ""지난 여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난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어. 더는 용납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되었지. 어떤 때는 거울 앞에서 수염을 깎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면 믿을 수 있겠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옷을 다르게 입는 것이었어! 하지만 이 모자… 이 외투…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안경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있겠어? 그런데도 이렇게 입는 것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고 터무니없게 여겨지는 거야! 오, 그래. 온 곳으로 돌아가는(*로마의 서정시인 카툴루스의 시구에서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이 상황을 말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순 없어.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나'에게 무력감을 토로할 때 파디가티는 이미 병원에서 해고된 후다. 인종법의 통과 가능성이 언론 보도로 알려져 '나'가 불안에 휩싸인 시점이기도 하다. 파디가티는 '나'를 위로하면서도, '왜 떠나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는 부정적으로 답한다. "내 경우는 너랑 완전히 달라." 이곳을 떠나도 다시 예전같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 하지만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인종법은 절대 공포되지 않을 것"이라는 친구 변호사의 말에 '나'의 아버지는 기뻐하지만, '나'는 "나는 무엇 때문에 부모님의 희망을 공유하지 못하는 걸까" 궁금하다.


"아버지의 기쁨은 부당하게 쫓겨났다가 선생님의 복귀 명령을 받고 교실로 돌아온 학생의 기쁨과 같았다. ...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소설에서 경제적 계층, 계급이나 신분은 별 중요성을 띄지 않는다. 등장인물 다수가 부르주아인 데다, 금전적 어려움을 묘사한 장면도 없다. 상업적 성공으로 생활 수준이 높은 이탈리아 북부의 현실을 고려한 서술이겠으나, 작가의 의도도 개입됐다고 생각한다. 번역본 기준 140페이지 남짓 분량은 인종, 성적 지향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다루기에도 충분히 짧고, 바사니가 특별히 계급에 예민한 작가도 아닌 것 같다. 신분제는 와해됐고, 빈곤은 극한 차별보다는 차별과 연민이 복잡하게 얽힌 대상이었던 시대다.

  차별의 원인 일부를 세밀하고 정확히 그려내는 게 모든 요소를 흐릿하게 보여주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니노처럼 무지를 원인으로 한 차별 한편엔 라베촐리 부인처럼 무례하고 악의적인 인물도 있다. 전자는 '나'를, 후자는 파디가티를 향한 태도이다.


  "하필이면 아는 사람들로 우글대는 바로 이곳 리초네에 오다니! 페라라에서 온 누군가를 맞닥뜨릴 위험이 없는 해변이 이탈리아에 수도 없이 많을 텐데, 하필이면 이곳에 나타나서 스스로를 구경거리로 만들다니! 그럴 순 없다. 오로지 "추잡한 늙은이"(이렇게 말하는 라베촐리 부인의 여왕같이 크고 푸른 눈에서는 격렬한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타락한 늙은이"나 그렇게 행동할 법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파디가티의 고통을 알아보는 사람은 '나' 뿐이다. '나'는 "라베촐리 부인은 떠들어댔고, 나는 그녀가 어서 입을 다물었으면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말은 부당했다"고 말한다. 약점을 비밀처럼 지녀본 이들은 알 것이다. 모든 상처받은 사람이 다른 이의 아픔을 알아보는 것은 아닐 테지만,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하고 예민한 것은 상처받은 사람 뿐임을.

  두 소수자의 연대는 떠돌이 개를 함께 만나는 작품 말미 절정에 이른다. 리초네가 이야기의 전환점이라면, 페라라에서의 만남은 서사의 꼭짓점이다. 파디가티가 '나'에게 "내 경우는 너와 완전히 달라"라고 토로하는 시점이다. '나'와 헤어진 파디가티는 다음날 '나'에게 전화를 걸어 개를 집에 데려간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도 이건 절대 모르겠지." 하고 말을 이었다. "그 개가 뭣때문에 밤새도록 나가고 싶어했는지 말이아. ... 새끼들 걱정 때문이었어! 어떻게 알았느냐고? 나중에 내 방구석, 개가 있던 자리에서 널따랗게 젖이 흘러 생긴 웅덩이를 발견했거든. 밤사이에 말하자면 젖이 불어올랐던 거지. 그래서 그토록 안절부절 못하면서 끙끙거렸던 거야. 그 개는 오롯이 혼자서 아무도 모르는 고통을 견디고 있었던 거야. 불쌍한 것!""


  둘의 불안과 고통을 그리는 바사니의 화법은 내내 덤덤하다. 서술의 어조는 격정적이지 않고('나'의 성격이 그러했으리라), 인종차별은 예견될 뿐 현실에서 잔혹히 구현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파디가티를 무너뜨린 소동도 일이 끝난 뒤에야 전해진다. 시달리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건 자체보다는 반응이고, 도래한 현실보다는 불안한 예감이라는 듯이.

  "너도 이건 모르겠지"라는 파디가티의 말은 끝내 자신을 이해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동시에 그런 말을 굳이 전화를 걸어가며 건네는 모습은, 실낱같은 희망을 그가 여전히 버리지는 못했다는 방증처럼 보인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 부모님이 내가 누구랑 말하고 있는지 알아챌까봐 걱정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단음절로만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통화를 얼른 마치기를 내심 바랐다. 하지만 먹히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깨어진 날 파디가티는 숨을 거둔 채 발견된다. 이것은 전화로 상징된 소통의 열망이 끝내 좌절되는 이야기일까. 둘이 소통한 원인 못잖게, 만나지 못한 이유도 그들 바깥에 자리했다는 것을 바사니는 내내 그린다. 파디가티의 '금테 안경'을 깨뜨린 사람은 델릴리에르스였다.


덧. 이탈리아 도넛은 어디서 팝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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