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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문희 Dec 07. 2022

소설을 잘 모르지만 읽고 있습니다

221207

   며칠 책을 제대로 못읽었다. 연타석 송년회의 여파. 어제 부서 회식도 새벽 두 시쯤 끝났고, 집에 와 씻으니 세시 남짓이었다. 재밌게 놀긴 했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잠을 못 이뤘다.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났고, 책을 폈고, 내 체력을 믿었기에 아무런 부담없이 내 각막 활자를 소개시켜줬고 그런 만남이 있은 후부터….



  체력을 갈아가며 읽은 책은 영국 출신 비평가 제임스 우드의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신간 <인생의 역사>를 읽다가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어 새삼 흥미가 생겼다. 예전에 읽은 적 있는 책인데, 내용이 뭐였는지는 생각이 잘 안났다. 이해를 못했던 것이겠지. 지금은 어떠려나.     


  "체호프는 입센의 작품을 보며 '인생은 저렇지 않아'라고 잘라 말한 적이 있다. 입센의 세계는 아무리 복잡한 비밀도 결국은 풀리면서 끝나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 '문학적인' 세계라는 것. 체호프는 다르다, 라고 비평가 제임스 우드는 말한다. 체호프는 수수께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로 끝낸다고. 인생의 질문들 앞에서 '난 모른다'라고 중얼거릴 따름이라고. 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서문     


  신형철이 인용하는 제임스 우드의 말은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의 마지막 장에 등장한다. 해당 장의 표제는 ‘진실, 관습, 리얼리즘’.


  “관습 자체는 은유 자체와 마찬가지로 죽어 없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늘 죽어간다. 그래서 예술가는 늘 관습을 능가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것을 능가하려고 애쓰는 와중에 예술가는 또 다른 죽어가는 관습을 만들어낸다. 이 역설이야말로 시인과 작가들이 어떤 종류의 리얼리즘을 거듭 공격하면서도 결국은 자기들 고유의 리얼리즘을 내세우게 된다는, 잘 알려진 또 하나의 문학사적 역설을 설명해준다. ... 플로베르는 한편으로 ‘리얼리즘’ 운동에 엮이기를 꺼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특정한 책들을 ‘진실되지 못하다’고 여긴다. (체호프도 입센의 극을 보면서 유사한 표현을 썼다. ‘하지만 입센은 극작가가 못된다… 입센은 삶을 모른다. 한마디로, 실제 삶에서는 저렇지 않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중     


  리얼리즘이 하나의 장르이자 관습에 불과하다는 주장 못지않게, 제임스 우드의 반격도 요즘말로 ‘흔템’이다. 제임스 우드는 현실에 등장할 법한 물건, 풍경을 소설에 쓰고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일을 그려낸다고 해서 리얼리즘이라고 보지 않는다. 엉뚱하게도 그는 카프카의 <변신>을 리얼리즘의 일환으로 보는데,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을 두고도 인생 어느 구석에선가 발견될 수 있는 감정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자기 가족에게 내쫓기면 벌레가 된 느낌이겠구나”). 일상적인 것을 다룰 때에도 관습적인 형식이나 메시지를 넘어서라는 것의 그의 요구다(제임스 우드는 ‘삶같음(lifelikeness)’, ‘삶 동일성(lifesameness)’ 같은 용어와 구분해 ‘삶다움(lifeness)’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보다 내게 인상깊었던 제임스 우드의 주장은 책의 1장인 ‘서술하기’에 있었다. “소설의 집에는 창문은 여럿 있어도 문은 두셋밖에 없다. ... 신뢰할 수 있는 서술(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신뢰할 수 없는 서술(독자가 궁극적으로 알게되는 것보다 제 자신에 대해 적게 아는,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서술자의 서술)이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 해당 챕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그 한계가 상대 측에 의해 과장되었다. 실제로 일인칭 서술은 보통 신뢰할 수 없다기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편이고, 삼인칭 ‘전지적’ 서술은 보통 전지적이라기보다는 제한적이다.”

  전지적 서술이 제한적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작중 인물이 집에서 혼잣말하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인물의 혼잣말을 직접 인용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작가 자신의 문투가 직접 인용에서 많이 드러난다고 우드는 주장한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는 간접화법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우드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3인칭 서술 사이 사이, 해당 인물이라면 꺼내들 법한 단어를 끼워넣으라고 말한다. 우드는 ‘자유간접화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플로베르는 작가가 ‘몰개성적’이며 신과 같고 초연하기를 바랐지만, 그의 문체 자체가 고도로 개성적이어서 그의 정교한 문장과 세부묘사는 신이 매 페이지마다 눈에 잘 띄게 남긴 서명에 다름없었다는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역설이 생겨났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중     


  “자유간접화법은 ‘테드는 바보 같은 눈물 사이로 오케스트라를 쳐다보았다’에서처럼 거의 눈에 띄지 않거나 들리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하다. 나의 예에서는 ‘바보 같은’이란 단어가 이 문장이 자유간접화법으로 쓰였음을 표시한다. 그것을 제거하면 ‘테드는 눈물 사이로 오케스트라를 쳐다보았다’처럼 표준적 양식으로 전달된 생각이 된다. ‘바보 같은’이란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이 단어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이 생겨난다. 연주회장에서 어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내가 인물을 바보 같다고 할 리는 만무하다. 경이로운 연금술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 단어는 이제 부분적으로 테드에게도 속하게 된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울고 있고, 이 ‘바보 같은’ 눈물방울을 떨어지게 놔뒀다는 것이 당혹스럽다(우리는 그가 맹렬히 눈을 비비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일인칭으로 다시 변환해보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멍청한 브람스의 곡 때문에 울다니 바보 같아’라고 그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 예문은 여러 단어가 더 길어질뿐더러 작가의 복잡한 존재를 전달하지 못한다. / 자유간접화법이 그토록 쓸모있는 것은 우리 예에서 보듯 ‘바보 같은’ 유의 단어가 은근슬쩍 작가와 인물 양쪽에 걸치기 때문이다. 독자는 누가 그 단어를 ‘소유’하는지 장담할 수 없다. ... 자유간접화법 덕에 우리는 작중인물의 눈과 언어뿐만 아니라 작가의 눈과 언어를 통해서도 사물을 본다. 우리는 동시에 전체적 앎(omniscience)의 차원과 부분적 앎(partiality)의 차원에 깃든다. 작가와 인물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고 그들 사이의 다리-자유간접화법 그 자체-가 그 간극을 메우는 동시에 그 거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극적 아이러니의 또다른 정의에 다름 아니다. 즉 작중인물의 눈을 통해 보면서도 작중 인물이 볼 수 있는 것 이상을 보도록 부추겨지는 것이다(이때 작중인물의 신뢰할 수 없음은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화자의 경우와 동일하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중     


  제임스 우드가 ‘작중인물’에 대한 평가 방식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도 흥미롭다. 그는 ‘인물이 평면적이다’라는 등의 비판을 “헛소리”라고 쓴다.      


  “<소설의 양상들>에서 포스터는 이제는 유명해진 ‘평면적(flat)’이라는 용어를 써서 소설에 거듭 등장하는 동안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단일한 본질적 속성이 부여된 작중인물을 묘사했다. 흔히 그런 인물들은 관심을 끄는 표현, 표어처럼 덧붙이는 말, 핵심적인 용어 따위를 사용하는데, ‘나는 미코버씨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예요’라고 되풀이하기를 좋아하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미코버 부인도 그런 예다. 그러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지킨다. 포스터는 평면적 인물들에 대해 싹싹하지만 속물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그들을 강등시키는 한편, 최상의 범주는 더 입체적이거나 더 온전한 인물들 몫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다. ... 단편의 작중인물들에게는 ‘입체적’으로 될 공간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포스터의 구분법은 단편에 비해 장편에 큰 특혜를 주는 셈이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중     


  우드에 따르면 소설의 어떤 인물은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찰나에 “살아있고 인간적인 그 무엇”을 드러낸다. 반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변화하는 인물도 전혀 흥미롭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섬세함-분석, 탐구, 관심, 느껴지는 압박감 등의 섬세함-이며, 섬세함을 도모하는 데는 아주 작은 기재사항이면 족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꼰다.     


  “미코버 부인처럼 일정한 종류의 자기표현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운을 맞춘 어구, 상투적 표현, 반복적 동작들을 줄이어 사용하는 사람들을 우리 모두는 현실의 삶에서 알고 있다.” - 제임스 우드,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중     


  우드의 주장은 소설 작법과 비평에 있어 지극히 까다로운 축에 속하는 것 같다. 당장 그가 내세운 기준에 부합할 만한 소설을 떠올리기부터 쉽지 않다. 무슨 말인지도 실은 잘 모르겠다. 다만 시점을 영화 속 카메라의 위치로, 캐릭터를 인물의 시선 처리와 행동으로 번역해 읽어보니 조금은 납득이 간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주장 하나. 제임스 우드는 문학이 ‘나이 든 사람’의 편이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더 많은 책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우드의 표현을 빌리면 이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사항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 부분에서 나는 지난 여름 제주도에서 읽은 <시핑 뉴스>의 저자 애니 프루를 떠올렸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 소설 저자인 그녀는 1988년 오십대 중반 나이로 첫 단편집을 출간했다. 이후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었지만 작가로서 이력이 빨랐다고는 보기 어렵다. ‘소년 급제’를 강조하는 한국에선 물론이거니와, 서양인이 볼 때도 그랬던 모양이다. 가디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애니 프루가 내놓는 답은 이러하다.     


  “You have time to have a life, to see change, to understand a bit how people work, how the world works, how society works, how things shift around, how slippery things can be, everything from politics to personal relationships. It’s a great advantage to have that stuff under your belt when you start to write.” - <Annie Proulx: ‘I’ve had a life. I see how slippery things can be’>, Lucy Rock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6/jun/05/annie-proulx-ive-had-a-life-i-see-how-slippery-things-can-be


  온전히 동의하기엔 찜찜한 주장이다. 하지만 지지한다. 한 인간의 행위와 내면은 한 권 책쯤은 돼야 가까스로 짐작해볼 수 있다고, 그래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다시 써내는 글이 문학이라고 생각하기에. 우드의 말은 이번에도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내일도 소설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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