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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W Apr 22. 2022

스승 말고 교사

교사의 역할과 책임에 대하여

  책임은 권한에 대한 반대급부다. 권한이 없는 곳에 책임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교사라는 직업은 많은 것을 요구받는다. 카톡 프로필 사진도 조심해야하고 퇴근 이후의 삶도 간섭 받는다. 교사를 ‘스승’으로 부를 때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스승과 제자라는 말이 오글거린다. 그냥 힘 빼고 교사와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무래도 편하다. 직업인으로서 교사가 되고 싶은데 이런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보이는 것도 부담스럽다.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라는 표현이 왠지 욕처럼 들리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쉽지 않았다. 우선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직업인으로서의 교사에 충실해야 한다. 퇴근 이후의 삶에 간섭받지 않으려면 근무 시간에 학교 일에 성실하게 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학교 일은 크게 수업, 업무, 생활지도로 볼 수 있는데 수업과 업무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써야 할만큼 할 말이 많다. 이 자리에서는 생활지도에 대해 써보려한다. 최근 교사의 책임과 권한에 대한 생각이 생활지도를 하면서 시작됐다.


  가볍게 시작하자면 며칠 전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학부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학교에 두발 규정이 어떻게 되냐는 문의였다. 당연히 학생 개성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므로 두발규정 자체가 없다고 안내했다. 그 학부모는 다시 한번 물었다. “머리를 탈색을 하든 염색을 하든 지지고 볶든 상관 없다고요?”

다음날 이 학부모가 누구의 엄마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한 학생이 탈색과 염색을 한 아주 노란 머리를 하고 왔기 때문이다. 나는 예쁘다고 반응해줬다. 그 학부모는 학교 규정을 아이 앞에서 확인하면서 자녀의 염색을 말려보기 위해 학교를 마지막 보루로 삼았던 것 같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 해도 머리를 그렇게 하는 것을 학교가 허용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학교는 더 이상 학생의 두발에 대해 제재할 권한이 없다. 그러니 그에 대한 책임도 없다. 그 학생을 설득하는 것은 가정에서 부모님이 해야할 일이다. 이는 한 예시일 뿐 “아이가 아침에 잘 못일어나니 선생님이 한 마디 해달라”, “아이가 하루 종일 게임만 한다. 혼 좀 내달라” 등등 부모님이 어쩌지 못하는 일을 교사에게 요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교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정말 말 한마디 뿐이다. 하루에 몇시간 함께 있는 교사에게 같이 사는 부모님이 자녀의 생활태도를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교사는 심리치료사도 아니고 훈련사도 아니다.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비기를 갖고 있을 리 없다.

연배가 있으신 선배 교사들께서 간혹 학생의 머리나 복장으로 꾸중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조마조마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꼭 학부모 민원이 어김없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를 혼내주세요 하는 부모님이 간혹 있지만 교사의 권한을 넘어서는 요구사항 중 하나가 됐다. 그건 더 이상 교사의 일이 아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학교폭력 업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2019년부터 ‘학교폭력심의위원회’가 학교가 아닌 교육지원청으로 옮겨졌다. 사안조사는 학교가, 이를 두고 조치결정은 교육지원청이 하는 구조다. 더 이상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생 사건에 대해 판결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실제로 이로 인해 학폭 업무가 한결 수월해졌다. 학폭조치에 불복하는 학부모의 원망과 법적 대응이 더 이상 교사를 향하지 않고 교육청을 향하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고생하시는 장학사들께 감사할 뿐이다.)


이것도 권한과 책임의 관점으로 보자면 생에 대한 판결 권한이  이상 교사에게 없는 것이다. 교사는 판단하지 말고 사안에 대해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보고하면 된다. 책임도 거기까지다. 꾸중하거나 위로도 조심해야 한다. 올해  번은 담임 교사가 상담  폭력사건 관련학생에게 “에효그래도     참지 그랬니라고 말했다가 보호자의 문제제기를 들어야 했다.  상황에서  억울한 우리 아이에게 참으라고 강요하느냐고. 다른 사건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 뒤에야 교직원회의에서 이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위로도 자칫 잘못했다가는 한쪽 편을 들었다는 얘기를 듣기 좋으니 모든 판단을 배제하고 생활지도관련 부서로 넘기라고 해야 했다.


학교폭력 사건에서 교사의 책임은 무엇일까.

첫째,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현장에서 형식적으로 이뤄진다는 한계가 있지만 나중에 “이 일이 벌어지도록 학교는 도대체 뭘 했냐”는 비난에 교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연간 정해진 학교폭력예방교육의 실시 여부다. 아이들이 듣지 않아 벽에 소리치는 심정이더라도 성실하게 교육하는 수밖에 없다. 그 중 한 두명이라도 들었다면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둘째, 사안이 발생했을 때 대처를 잘해야 한다. 가해, 피해 학생을 분리하여 안전을 확보하고 섣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초기부터 양쪽 보호자에 알려서 공정하게 처리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한다. 잘잘못이 명백해도 말을 아껴야 한다. ‘가해자’, ‘피해자’ 대신 ‘관련자’로 지칭한다. A학생이 패드립을 했고 B학생이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사건에서 B학생 보호자는 자신의 자녀가 언어폭력의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교사는 매뉴얼에 맞게 그리고 양쪽 보호자가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규정대로 처리해야 한다. 판단 권한이 없다. 판단하지 말자.


셋째, 교육지원청의 조치 결정 후 학생들이 교실에서 수업에서 다른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모든 사안을 비공개로 하여 학생에 대한 낙인이 없어야 한다. 자녀에게 문제가 생긴 학부모 중에는 비난할 대상을 찾아 결국 교사를 공격하는 사람도 있다. 비상식적인 경우라면 법적으로도 문제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교사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렇다고해서 그 스트레스를 학생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그것이 교사의 새로운 책임이다.

생활지도의 권한과 책임이 많이 축소됐고 이는 교사의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경감시켜줬다. 그 대신 학생들을 편견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 보호자의 억지에 대한 분노를 학생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현재 학교 교사들의 책무가 아닐까.


시대가 교사에게 기대하는 것이 바뀌었고 교사의 역할도 변하고 있다. 이것은 교권의 추락이 아니라 권한과 책임의 변화일 뿐이다. 학생 용의복장에서 두발 관리까지 교사가 아웅다웅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들의 갈등에서도 교사가 한 발 물러섰다. 이로 인해 학생들을 조금 더 여유있고 자상하게 대할 여력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직업으로서의 교사를 원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저 옛날부터 내려오던 스승의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현실에 적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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