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우리 애가 그럴 리 없어요”
교사가 학부모와 상담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아득해진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선생님은 아직 중학생을 키워보지 않아서 모르실 겁니다”라고 말하는 학부모도 있었다(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이럴 땐 “저는 어머님(아버님) 보다 많은 중학생을 만나봤습니다만”이라고 응수하고는 했다. 집과 학교에서 아이들은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될 수도 있음을 학부모가 알았으면 하고 답답했다. 부모와 교사 중 학생의 문제를 누가 더 객관적을 볼 수 있을까?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담임교사는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는 업무를 마주하게 된다. 생활기록부 ‘행동특성 및 발달상황(행발)’이라는 공간이 있는데 여기에 담임교사가 1년 동안 관찰한 학생의 특징을 적는다. 나는 업무노트에 학생별로 지면을 나누고 시시때때로 학생들의 특이사항을 날짜별로 기록해 둔 뒤 이를 참고하여 연말에 행발을 작성해왔다. 나의 행발은 나름 구체적이고 세세한 내용의 기록이라고 자부했다. 다소 학생에게 부정적인 내용이 있더라도 관찰 사실이라는 것과 그 목적이 교육적이라는 점에서 당당했다. 물론 작성지침에 따라 긍정적으로 발전 가능성을 덧붙여야 했지만 마치 부모님이 모르는 학생의 본모습을 내가 봤다고 말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니 감히 부모님께 중학생을 내가 더 잘 안다고 당당히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난사 가해자였던 딜런 클리볼드가 우리 반 학생이었다면 나는 그 학생의 위험 징조를 발견하고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위 사건 가해자의 엄마의 통렬한 자기 고백이다.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리틀턴에 위치한 콜럼바인 대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해 13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했다. 가해자 2명도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 사건 직후 세상은 이 사건의 원인을 가정의 무관심, 학대, 방치, 폭력 따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은 끔찍한 가정에서나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엄마는 책임회피를 위해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쳤던 실수를 누군가 되풀이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세상의 추측이 틀렸음을 이야기한다. 가해자의 가족이 평범했고 혹은 남들보다 화목한 가정이었다는 사실은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라는 경고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인과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책을 읽는 학부모와 교사는 공포를 느끼게 될 것이다.
클리볼드 부부는 딜런에게 성교육, 비폭력, 인성교육, 경제교육은 철저히 했지만 뇌 건강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했을 뿐이다. 화목함 속에서 딜런은 우울감을 키워갔고 능숙하게 부모에게 감정을 위장했다. 딜런의 뇌는 건강하지 않았고 에릭(또 다른 가해자)과 교제하면서 참사를 일으키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뇌 건강에 대한 교육을 자녀에게 하는 부모는 얼마나 될까? 자녀에게 빈틈없이 교육을 하고 사랑과 애정을 듬뿍 주었다는 사실의 자녀의 뇌 건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자녀의 문제가 부모나 반드시 가정에서 기인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어 보길 바란다. 자녀의 정서 문제를 부모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었던가. 오히려 부모 하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면 안도할 일이다.
나는 교사로서 두려움을 느낀다. 사고를 치는 녀석들은 오히려 상담을 하고 눈에 띄기에 예의 주시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또는 우수하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속으로는 우울감에 빠져있지 모를 일이다. 그들이 보내는 위험신호를 내가 무지하여 못 보고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감정을 스스로 위장할 수 있어 부모와 교사가 그 속을 알기 어렵다. 이런 사실이 부모와 교사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학생을 잘 알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기고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학생에 대해 조금 더 자세를 낮추게 되었다. 행발을 쓰는 작은 칸이 부담스럽다. 누군가에 대해 쓰려면 이처럼 책 한 권은 나와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어떤 학생이 보이는 위험 신호를 내가 소홀하지 않게 포착하길 바란다. 그래서 학부모님과 같이 고민할 수 있기를.
이제 학부모와 상담할 때 “부모님도 저도 학생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라고 말하게 될 것 같다.
내 중학교 행발은 어떻게 쓰여있을까 궁금해졌다. 많이 싸웠지만 큰 사고 기록은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 중학교 시절은 폭력적이었고 위험한 생각을 많이 했다. 화가 나면 구체적으로 학교에 어떻게 해코지를 할 것인지 상상하며 그 이후 망가지는 내 모습에 슬퍼할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다가 지쳐 잠들었다. 그게 통쾌한 복수 같다고 느꼈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런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철없는 사춘기 생각이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혹시 내가 딜런 같은 우울증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돌아보게 된다. 당시 나의 위험 신호를 읽어낸 사람은 없었고(나 자신도 몰랐다) 학교에서 상담은 한차례도 없었다. 역시 내 행발에는 우수하다는 의미 없는 말만 복붙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