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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ul 02. 2022

살다 보니, 지나고 나니

2022. 6. 29. 서울신물 칼럼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얼마 전, 우리 동네 단골 밥집에 갔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와서 단출하게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 나누다 가는 사랑방 같은 곳, 나의 다정한 ‘동굴’이기도 하다.  혼자 빨리 밥 한 그릇 먹고 나가야지 하고 앉아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남자분 두 분이 보기에도 기분 좋게 한잔하고 계신다. 


“내가 산 좋아해서 다행이지. 몸이 버틴 거야. 그냥 술 먹고 지나갔으면 큰일 날뻔한 거야.”


한 아저씨가 아직 이른 저녁인데도 벌써 얼굴에 붉은 달이 떴다. 


“나한테 희망이 있고 비전이 있는 것이 중요해. 돈 오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맞는 말씀이다. 사실 지금 잃을 돈조차 없는 이들에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절박하겠지만, 앞으로 올 날에 대한 희망이야말로 작금의 무간지옥을 저벅저벅 걸어 지나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이 되니 말이다. 


“이혼하고 잊는 데 10년 걸렸어. 돈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족이 깨진 거야. 하루 일 마치고 집에 딱 들어가잖아. 그럼 바로 전전주까지 ‘아빠 오셨어요?’ 하면서 마루에서 놀던 애들이 없어.”


이쯤 되니, 나의 레이더망을 거둘 수가 없었다. 내 앞에는 주문했던 따끈한 밥이 한 상 차려져 나왔는데도 저 아저씨의 산전수전 회고담을 안 듣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급여를 내가 주기 때문에 내가 얼마 가지고 가는지는 전혀 몰라. 내가 월급을 더 받고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이제는 아저씨의 사업 이야기로 전환국면을 맞이하고. 


“통장에는 만 원 남았는데, 결제할 것이 천만 원이야. 참 아찔해. 이대로 또 무너지나 했지. 그래도 마음먹고 구하려 하니까 길이 다 생기네.”


혹시나 이번에 구한 돈, 앞으로 쉼 없이 갚아 나가야 한다고 해도, 오늘만은 긴장 풀어 자축하고 내일 다시 살아나갈 일이다. 


“책 하나 나올 거야. 내가 그걸 견딘 거는…. 그래도 결국은 믿음을 잃지 않았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날 믿었어." 


그리고 계속 이어 나가는 아저씨. 


"머리털 다 빠지는 줄 알았어."


아저씨 일행이 앉은 테이블에서 좀 떨어져서 목소리만 듣고 받아 적다가 고개를 들고 아저씨를 바라봤다.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았는지, 머리카락이 이미 성글다. 

살다가 보면 내가 손 쓸 길도 없이 일이 풀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주변에서 해주는 조언, 하나도 안 들린다. 특히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는 말은 왜 그렇게 얄밉던지.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 숨 막히고 아픈데, 해결해 줄 방법이 고작 시간이라니. 

그런데, 지나고 나니 그 순간들이 모두 ‘옛일’이 되어 있는 기적이 벌어진다. 한때는 ‘살다 보니’, ‘지나고 나니’라는 말, 참 듣기 싫었는데, 오늘은 내가 모둠 세트로 한 접시에 담아서 쓰고 있으니 이미 나도 무시무시한 중년 꼰대로 성장하고 있구나. 

그러나, 별 도리 없다. 그저 머리털이 다 빠질 정도로 힘들게 오늘을 버티는 모든 분에게 지금 글자 하나하나 힘을 실어드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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