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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Sep 15. 2022

독자여, 안녕!

갈길이 먼 내가, 뒤를 한 번 돌아보니. 

내가 불쑥 말했어

애국심은 팬티와 같아 누구나 입고 있지만 

나 팬티 입었다고 소리치지 않아

먼저 팬티를 벗어야 해

우리는 팬티를 벗었어


하지만 나는 끝내 벗지 못한 것 같아 

눈만 뜨면 팬티를 들고 흔드는 거리에서 자란

나는 하나를 벗었지만, 그 안에 

센티멘털 팬티를 또 겹겹이 입고 있었지


사랑은 참 어려워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 


- <작가의 사랑> 문정희


***


1. 

지금까지 돌아보면 글 쓰는 데에 굽이굽이 단계가 있었던 듯하다. 


>1단: 마음이 뜨거워서 의식의 흐름대로, 때로는 날카롭게, 늘 화가 나 있듯이 쓰기(그래야 독자들이 열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 


>2단: 앗 뜨거! 하고 크게 데인 후, 글쓰기의 방법을 굳이 찾아다니면 배우기 시작함. 시행착오 엄청 많았음. 


>3단: 슬슬 글쓰기가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그제야 알게 됨. 그나마  이거 큰 거 하나 알아서 다행임. 이때쯤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게 됨. 


> 4단: 살면서 처음으로 남들이 읽는 글쓰기라는 것에 공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 지금까지 공식 진짜 개무시했고, 나는 그런 거 모르겠다, 그저 영혼으로 쓰는 줄 알았음. 슬슬 내 색깔과 '공식' 사이에서 정도를 맞추는 연습을 하게 됨. 


> 5단: 이도 저도 아닌 줄타기(책을 위한 글과 영상을 위한 글 사이)를 수 년째 하면서 슬슬 지쳐감. 나는 개뿔 아무것도 아니고, sns 글이나 열심히 쓰면서 다른 일 하고 살아야 하나 의문이 생길 때 즈음... 

다시 1단계로 내려가게 됨. 나도 나를 이해 못할 글을 계속 써서 미칠 지경. 불안감까지 고조.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며... 


2. 

그래서 집어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시집'이다.

시는 산문보다 대체로 길이가 짧다.  덩치도 가볍다. 그런데 눈이 오래 머문다. 나 같은 산만한 인간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글체력장이다. 마치 시나리오가 글자가 적다고 결코 쉽게 쓰여지는 글이 아니듯. 

내가 이 글을 왜 쓰나, 어렵게는 맥락, 쉽게는 마음의 지도를 잡아야 하는데 못 잡고 절벽에 와 있는 느낌일 때가 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시 초심. 오랜만에 글쓰기 1단으로 기어 내린 김에 시집을 읽어본다. 문정희 시인의 '곡비'는 이미 내 에세이 <시나리오 쓰고 있네>에 소개했을 만큼 좋아하는 시이기도 했다. 


3.

'지금까지 돌아보면'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안다. 나는 사진에 보이는 저 천막 치려고 지금 무거운 텐트, 폴대(? 요즘도 폴대 있나?) 들도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이 사진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다. 저렇게 올라갈 길이 구만리인데. 

나는 언제쯤 빤쓰를 시원하게 돌돌 벗어제낄 수 있을 것인가. 


4. 

독자여 안녕! 살아 있으면 또 훗날. 우리 힘차게 살아가자. (...) 그럼 이만 실례. 

<쓰가루. 석별. 옛날 이야기> -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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