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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Nov 06. 2023

뭔가 성장하는 것 같다!

죽은 드라마 살려내는 중인 언니의 뇌피셜 

비가 오락가락한다. 아침 일찍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발해서 서울까지 올라온지라 남한은 거의 저 끝에서 위까지 다 훑은 셈인데, 전국 날씨의 표정이 다 다르다. 울고 웃고 심통내고... 

아까 아들하고 함께 수영장에 가면서 함께 하늘에 뜬 무지개를 만났다. 예쁘게 아치형을 그린 무지개는 아니지만 빨주노초파남보가 꽤 선명해서 아들은 아주 신이 났다! 

"엄마, 무지개 위를 걸어갈 수 있을까요?"

벌써 열 살인데, 이런 신선한 질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자폐 친구를 키우는 부모들의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다. 

"글쎄... 무지개 위를 걸으면 혹시 떨어지지는 않을까?"

나는 이 굉장한 질문에 뭐라고 할 말이 없어서 대충 둘러대고야 말았다. 그래도 이야기를 지어서 돈을 버는 사람인데 상상력이 몹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안 떨어져요. 구름이 있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무지개는 레이보우예요! 영어로 레인보우예요! 이 말을 백 번 외친 아들. 귀에서 피나는 줄. 


지난 번 글에서 밝혔다시피 제작사 대표님과 감독님 그리고 나 이렇게 의기투합하여 작년 여름부터 기획했던 드라마가  11월 3일에 대망의 계약서를 작성하고 일 년이 지났으나 기획안이 쿵쿵 다 엎어져 네 번째의 기획안을 쓰고 있다. 나의 심정은 우리 아들이 이야기한 저 하늘 위의 '무지개 다리'를 건너는 마음이다. 아름다운 빛을 즈려밟고 올라타고는 있지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그러다가 지난 주 금요일부터 산청 지리산 자락에 내내 틀어박혀 기획안 작업을 하면서 무엇인지 모를 벅찬 경험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아들이 이야기한 바로 그 '구름'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얼룩소의 이기원 작가님이 쓰신 드라마 작법에 관한 글 <공모전에 당선되는 극본 쓰기>를 읽었다. 물론 브런치에서도 일부 공개를 해 놓으셨는데, 나는 얼룩소에 가입해서 1대 1 레슨받는 심정으로 꼼꼼하게 읽었다. 머릿속에는 지금 쓰고 있는 기획안을 넣어 놓고 한 챕터 한 챕터 모두 내가 쓰는 이야기에 집중해서 적용해봤다. 


이기원 작가님은 무조건 '시놉시스'는 쓰지 말고 극본을 쓰면서 이야기를 확장하라고 하셨는데, 나도 이 방법에 백프로, 천프로 공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 드라마 시장은 이 '시놉'이 나와야 돈을 대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다음 단계 진도를 뺀다. 정말 안타까웠다. 

그래도 억지로 어찌저찌 시놉을 쓰고, 더 확장 심화된 트리트먼트라고 할 수 있는 화별 줄거리로 가면 완전 가관이다. 작가 바보되는 것은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일이다. 원대한 포부와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노트북을 펼쳤던 사람들도 심지어 화별로 쪼개어서 중요한 대사까지 넣어보라고, 다들 그걸 보고 어디 내가 기준에 맞을지 안 맞을지 심사를 해보겠다고들 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원칙은 대본이 끝까지 나오고 난 후에, 하다못해 헤밍웨이가 '모두 쓰레기'라고 했던 바로 그 초고까지라도 낸 다음에 시놉시스와 화별 줄거리가 나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기꺼이 '바보짓'을 해내고 있다. 내가 만약 천재라면 이 바보짓도 훌륭하게 해낼 테니까. (문제는 내가 천재가 아니라서 그냥 훌륭하게 쓸 도리밖에는 없다는 것... 제 마음이 어렵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말 다 뜯어고치기 작업을 하면서 만난 나의 소소하고도 든든한 '구름'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깃마인드. 

무료 툴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마인드맵을 정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것을 쓰면서 캐릭터를 정리하니까 진짜 좋았다. 각이 살아나는 느낌... 이 시절은 볼펜으로 A4 용지에다가 캐릭터 맵 정리할 때가 아니다. 1. 기획의도 2. 인물 소개... 이 중, 2번 인물 소개 이런 것 줄줄이 한글 파일에 쓰면서 뭉개지 말고, 깃마인드로 혁신하세! 


두 번째. 스크리브너. 

스크리브너를 쓰면 다시는 한글 파일 시나리오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도 매번 스크리브너 배워야지, 배워야지... 하면서 아직도 이러고 있다.  다음 주 기획안 정리하고 나면 주말에 제대로 익혀서 적용해볼 예정이다. 스크리브너 툴 다 배울 필요도 없다. 대본을 쓸 때 필요한 방법들만 발췌초록할 예정이다.  


세 번째. 캐릭터의 매력. 

그동안 캐릭터 '매력' 때문에 진짜 고심했다.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주인공 여자가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여주인공 원탑 드라마인데, 여주가 매력이 없다니 이게 무슨 앙꼬 빠진 찐빵이란 말인가. 

매번 기획안 엎어질 때마다 소줏잔을 앞에 놓고 내게 들어오는 주문은 1부터 100까지 캐릭터에 매력을 잃지 말라고, 매력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알겠다고 알겠다고 얼굴에 발그레 달이 떠서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아무도 캐릭터의 매력에 대해서 속시원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의 매력이야... 그냥 타고난 거지!" 이러면 어찌 설명될 것인가.. ㅠㅠ 엉엉 울고만 싶었다. 

캔디(캔디❤️캔디)는, 김삼순(내 이름은 김삼순)은, 고애신(미스터 션샤인)은, 장만월(호텔 델루나)이는, 오해영(또 오해영)은, 이지안(나의 아저씨)은, 임진주(멜로가 체질)는.... 어찌하여 그토록 찬란하게 매력적이란 말인가! 


캐릭터의 매력이란 다음과 같다. 

동경심을 지니면서도 아, 그래도 얘도 나랑 같은 인간이네... 

매력= 동경심 + 동질감. 

동경심을 지니면서도 아, 존나 딱하네... 불쌍해... 어떡해...  

매력 = 동경심 + 동정심. 

평범한데 또 비범한.... 예를 들면 드라마 <무빙>의 우리 봉석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너무나 평범한 고3!) 자꾸 날라간다(이 얼마나 비범한 노릇인가!)!!

매력 = 평범 + 비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고개가 꺾어질 정도로 멋있고, 비범한데 또 나랑도 같은 구석이 있어야 한단다. 매혹적인 눈빛을 발사하며 보는 사람 숨도 크게 못 쉴만큼 런웨이를 걷던 모델이 미끄러져서 바보 같이 넘어지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이기원 작가님께 정말 뜨끈한 수육이라도 사서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과연 실제로 대본에서 매력을 어떠헤 구현할 지는 모르겠으나, 진짜 얼마나 실력 발휘를 할지는 모르겠으나, 감이라도 잡은 것이 어딘지! 하마터면 나 백 바퀴 더 헤맬 뻔했다. 


지난 9월 이후, 조금 힘든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런 일들을 그냥 에이! 재수없어! 하고 무심코 보내고 싶지 않다. 만약 그냥 쓸어버린다면 나는 그 한 달 여의 시간은 뚝 끊어져 없어지는 것이다. 혹은 내가 그 시간에 잡아 먹히는 것이다. 일련의 일들을 거쳐오면서 내게 남게 된 큰 의미는 바로 이 '동경심'이었다. 삶의 한 순간, 한 순간, 이 동경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 생은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자그마한 것에라도 동경하기. 그것이 이번 가을에 내게 남은 선물이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 이름도 남궁 윤이라는 이름에서 '진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뭔가 드라마의 분위기도 바뀔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오늘도 나는 아름다운 무지개 위를 조심 조심 건너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저 깊은 벼랑으로 뚜욱!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내게도 구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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