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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Nov 26. 2023

나 이거 망하면 죽음이라고?

벼랑 위의 포뇨냐, 황섬이냐.

얼마 전 박진영이 출연한 방송 두 개를 봤다. 한 개는 유퀴즈였고, 또 한 개는 성시경의 유튜브 채널이었다. 

유퀴즈에 방시혁 의장과 함께 나와 처음 음악을 할 무렵, 사무실에 직원이라고는 경리와 방시혁 한 명이었을 시절의 이야기를 박수치면서 편안하게 하는 것을 보고, 어쩜 저렇게 타고난 재능을 끝까지 쭉 짜서 다 쓸까 하고 감탄했었다. 

성시경의 유튜브 방송에 나와서는 성시경이 만들어주는 요리 즐기면서 편안하게 이런 저런 음악 얘기, 사는 얘기 하는데 워낙 성시경은 유재석과는 또 다른 사적인 편안함으로 진행을 하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지난 번 유퀴즈가 호감도를 40% 정도 올려놓았다면, 캐주얼하게 밥 먹으면서 하는 방송에서는 60% 이상 쭉 끌어올렸달까. 사람이 이렇게 열심히 살 수도 있구나, 수십 년 동안 열정이 변함없을 수도 있구나 하고 존경심까지 들었다. 음악과 사업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공들일' 에너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이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이야기하던 그 '몰입'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행복을 느끼고있다는 생각도 덤으로 얹고...   


그런데, 이 모든 에피소드 중에서 보다가 압도적으로 놀란 것이 있었는데 바로 박진영이 매년 공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벌써 50대 중반을 달려가고 있는데도 매년 뭔가 새로운 것을 들고나오는 것은 알고야 있었지만, 이렇게 매년 빠지지 않고 콘서트를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나는 콘서트 안 하면 죽어. 아, 못하게 된다면... 그건 죽음이야, 나한테는 그건 죽음이야."

진짜 한 해라도 콘서트를 하지 못하면 정말 죽을 것 같은, 박진영의 코에 산소 공급이 끊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천하의 JYP 박진영이 공연 일 년에 한 번 해서 얼마를 번다고... 지금 그 사람 재산이 얼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표가 안 팔려서, 자기의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진짜 간절해도 그렇게 간절해보일 수가 없었다. 


지난 주, 작업하면서 처음으로 드라마 그만 두게되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 상상을 해봤다. 드라마 기획부터 계약 맺고 지금까지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진짜 단 한 번도 그만둔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나는 질주하는 적토마처럼 될 것만 생각하고, 앞으로 달렸다. 

그래, 이번 기획안만 넘기면... 그래, 대본 1,2화만 쓰고 나면 수월해질 거야. 그러면 탄력 받을 거야. 그리고 이 스토리가 재미없을 리 없잖아. 내 피칭(짧게 줄거리 이야기하는 것) 들은 사람들 표정 보면 알아. 다 눈빛 초롱초롱해지고 재밌어 했어. 그러니 실패할리 없어. 

그런데, 나라는 인간도 이제 슬슬 지친 거다. 그리고, 뭔가를 만들어내고 확인 받고, 컨펌받고, 말하자면 평가받고 그에 일희일비하는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안 행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존감도 후두둑 떨어지는 것 같고 말이다. 

어느 순간에선가 나는 이 드라마 얼른 완주하지 않으면 내 존재는 죽어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성시경에게 "나 콘서트 안 하면 죽어!"라고 말하는 박진영처럼... (물론 박진영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ㅋㅋㅋㅋ) 

미팅을 준비할 때마다 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닌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상도 안 먹히고, 심호흡은 당연히 효과를 못 본지 오래다. 계속 숨은 가빠오르고, 하루하루 꽉 차고 편안하게 일이 진행되는 느낌이 희석되어갔다. 아이고, 안 되겠다. 어느 날 아침, 거실에 철푸덕 앉았다. 그리고 세찬 바람에 광폭하는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내 머릿속을 좀 억지로라도 가라앉혀봤다. 

'만약, 이 드라마가 최악의 경우 잘 되지 않고, 중간에 엎어지더라도 황서미라는 인간은 변하지 않아, 여전히 소중한 존재야.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야. 삶은 계속 되고 너는 또 다른 황서미를 가동시킬 수 있잖아. 벼랑 끝이 아니야. 힘 내, 힘 내, 힘을 내!'  

드라마 쓰는 황서미 말고도 수많은 황서미가 있다. 소설 쓰는 황서미, 칼럼 쓰는 황서미, 누군가를 인터뷰를 하는 황서미 등등... 이렇게 글 쓰는 황서미 말고도 엄마 황서미, 남편이 생활비를 벌어오고 집안 일 재미있게 하면서 책 읽으며 살고 싶은 황서미, 아이들이랑 재미나게 밥 해먹고 사는 황서미, 혼자 여행하는 황서미 등등...

이 드라마가 내 인생에서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황서미'라는 인간은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존재와 본질은 그대로 이 자리에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드라마 = 나' 이런 무시무시한 공식을 세우고 살고 있을까. 

그러나 마음 반대편에는 아직도 쉰 목소리로 내게 악악대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주제에 이런 간절함 정도는 온 뼈에 새기고 살아야지! 

그래, 맞네. 피나게 간절해야 원하는 정도의 반의 반이라도 따라가지. 나도 옛날 사람이라 이런 옛날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그런데도 모든 운동을 할 때 그 어떤 사람도 몸에 힘 꽉 주고 애절하고 간절하게 '이번 공좀 제발 잘 맞게 해주세요.', '이번에 때린 스파이크, 제발 상대편이 못 막고 팔목 꺾어지게 해주세요.'라고 빌어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 정도는 경험으로 알고는 있다. 그래도 자꾸 간절해지는 걸 어쩌라고. 



가방에 이 '씨네 21' 잡지를 부적처럼 가지고 다닌다. 너덜너덜 해졌다. 우리나라의 드라마 작가 22명의 인터뷰가 담긴 특별호다. 언젠가는 나도 이 리스트에 들 그날까지 이 잡지를 들고 다니겠다! 이러면서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일 년 넘게 지치고 지친 지금 내 목표는 기획안, 대본 조용히, 성실히 완주(매우 중요하다)하고, 계약했던 사항들 잘 이행하고, 방영까지 밀고 나가는 것. 사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대본 다 쓰고 제작사에 송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정말 하늘에 맡기는 것 뿐. 



요즘은 그동안 썼던 수천 장의 기획안에 얹어질 뿐인 새로운 20페이지를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안은 내가 가장 쓰고 싶었던 형태의 스토리라서 작업하는 데에 재미가 붙었다. 그리고 대본으로 바로 옮겨도 무난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기획안을 쓸 때는 소설을 쓰듯이 중간중간 대사도 넣으면서 리듬감 있게 쓰면 '뭔가 잘 쓴 기획안' 같이 보인다. 그리고 수십, 수백 번 시행착오는 겪다보니 얻은 결론.... 이야기 줄거리를 러프하게 잡은 다음에 바로 대본을 쓰기 시작해서 죽 혹은 밥, 뭐가되든 끝까지 완주한 후에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를 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시놉시스부터 먼저 쓴 다음에 그것을 지도 삼아 대본을 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대본 없이 트리트먼트 2-30장 안에 내용을 욱여넣자니 어디까지 디테일을 넣어야 하나 진짜 그 고민으로 3분의 2는 시간 다 보낸 것 같다. 그리고 힘도 빠지고, 재미도 없고... 

예를 들어 딸아이 한 명을 데리고 이혼을 한 여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혼을 한다고 해서 오케이, 도장 찍어, 쿵! 흥! 안 만나! 하고 하루만에 쫙 찢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 그럼 사람들, 이 여자가 주인공인 드라마의 기획안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것이, 어디까지 궁금할까? 


1. 그녀는 결국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다. 그리고 가정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법적으로 남이 되었다. 아무리 지긋지긋한 사람과의 결별이라도 '이혼'이라는 절차는 사지 중 어디 하나를 떼어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 


여기까지 간단하게 쓰고 넘어가야 할지...


2. 남편 **와 미친듯이 싸우던 날, 그녀도 악에 받쳐서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냥 허공에서 헛손질일 뿐이었다. '이젠 이혼이다'라는 생각으로 눈 앞에 불꽃이 튀는 와중에 충전기 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겨우겨우 눌렀다. 

몇 초 후, 이 모든 상황이 녹음이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 눈동자가 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아까의 두 세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이는 메트로놈처럼 그녀에게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결혼 생활동안... 키울대로 키웠다. 맷집이라면 그녀도 지지 않는다. 한참을 버티고 있는데, 다섯 살 배기 딸이 안방에서 문을 삐그덕 열고 나왔다. 

"엄마... 나 다 봤어."

(중략) 

가정법원에 서류를 제출하고 돌아오던 날 저녁, 집에 덩그러니 남은 그녀와 딸. 두 사람... 그녀는 식탁 의자에 힘 없이 앉아 있다가 온 힘을 쥐어 짜 일어나서 냉동고에 있던 조기를 꺼내 두 마리 바짝 구웠다. 그리고 두 식구가 나누어 먹었다. 다행히 딸은 한 마리 뼈 발라서 주니 걱실걱실 잘도 먹어주었다. 그녀는 그런 딸을 바라보며 소맥을 한잔 말아 구운 조기를 안주 삼아 들이켰다. 


이렇게까지 자세히 써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안 설 때가 있다. 답은 없다. 아니, 아직 잘 모르겠다. 1번도 2번도 사실 상황에 따라 다 맞을 수도 있다. 

기획안을 어떤 디테일의 수위까지 잘 맞춰서 쓸지는 대본 다 쓰면 답은 다 나온다. 어떤 장면을 넣을지 말지.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게 안 되는 이유가... 먼저 기획안이 통과되어야 대본이 들어가는 공정으로 다들 일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 같은 초짜, 드라마 작가들은 그들이 쓴 기획안 보고 아, 다들 안심을 해야 대본 들어가게 한다. 그래서 더,더,더,더,더 어렵다. (그렇다고 어렵기만한 나날들은 아니고, 그 안에서 애환과 재미도 있다. 너무 겁내지 말자!)


기획안을 최초로 읽는 사람들은 일반 대중이 아닌 제작사 대표와 피디들, 공모전이라면 심사위원들이다. 자기소개서 내는 것이랑 똑같다. 첫 몇 줄에 눈길을 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위에서 이야기한 '뭔가 잘 쓴 것 같은' 기획안이 중요한 것이다. 

가끔은 기획안을 쓰다가 굳이 기획안에 넣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사가 생각나면 따로 한 파일에 모아놓는다. 절대 머릿속으로 기억만 하면 안 된다! 특히 서른 살 넘어 마흔 다 된 분들, 진짜 기억 안 난다! 꼭 기록하자! 나중에는 어디다 써놨는지도 기억 안 난다! 내 나이쯤 되면 내가 뭔가를 적었다는 사실도 기억 못 한다! (왜 내가 !!!!를 남용했는지 꼭 기억하시길...)
나는 에버노트를 활용한다. 스크리브너를 쓰는 분들은 대본 씬 파일 맨 아래에 따로 모아놓는 것이 더 시각적으로 까먹지 않고 활용하기 좋을 듯하다. 


이번 주 목요일, 다시 기획회의다. 

너무 겸손하지 말기. 너무 배운다는 태도로 일하는 것도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과 사이는 돈독해질지언정 일을 진행하는 데에 좋은 자세가 아니다. 조금 더 용기 내어 의견을 내고 앞으로 나름대로 '고집부리고(?)' 끌고 나가는 힘을 키워야겠다. 일이 이렇게 늘어진 것도 내가 너무 황희 정승 같이 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뿔싸! 놓친 것도 많다. 


지난 주,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다시 힘 내본다! 

드라마 = 나 

내 인생에서 이것만은 아니라는 것 명심하고, 행복하게 다시 대본작업하러 가겠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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