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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Dec 27. 2023

[드라망생 일기]작정했다. 안 하던 짓을 하기로...

새벽 독서는 생각만큼 안 졸립니다.

아주 우연히 어떤 카카오 단톡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새벽 다섯 시 독서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라클 모닝 인증 릴레이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알았는데, 새벽나절부터 아자, 아자, 아자!를 외치는 인간들 같아서 별로였다. 안 그래도 힘든 인생, 저리 일찍부터 일어나 온 몸에 힘 꽉 주고 살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런데,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줌으로 함께 책을 읽고 토론. 하루 두 시간.  여러모로 고민이 됐다. 늘 잠이 모자라던 내가 과연 새벽 다섯 시를? 혼자 새벽에 일어나서 두 시간 동안 일을 하면 어떨까? 좋지. 그런데, 이게 과연 가능할까? 

오케이, 3개월, 일단 참가하겠다 결심을 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알렸다. 

남편은 안 하던 짓 하면 잘못 된다고 다른 길을 권고했다. 하던대로 2시까지 술 마시고 자기 전에 담배 피우라고......... ㅋㅋㅋㅋㅋㅋ

오기가 생겼다. 오냐, 3개월 동안 한 번 해보자. 정 사정이 있다면 한두 번 빠질 때 빠지더라도 해본다! 

지금 까지 2주차 평일 새벽 독서를 이어나가고 있다. 밤 9시 쯤 아이를 재우고 다시 작업실에 가서 밤을 새워 일하고 또 다음 날 저녁에 돌아오는 남편은 내가 새벽에 몇 시에 일어나는지, 늦잠을 자는지 마는지 잘 모른다. 남편 보여주려고 하는 일은 아니고, 나와의 약속이니까 그냥 지키고 있다. 

그리고 기획안만 일 년 반 넘어가는 짓거리를 계속 하다보니, 뭔가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변화가 있지 않으면 이거 큰일나겠다 싶었다. 내가 바뀌지 않는데, 글이 바뀌겠나? 이 생각이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일 년 넘게 다람쥐 쳇바퀴처럼 계속 기획안 쓰고, 대본 2화 잠시 나갔다가 다시 빽도 맞고 다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이 짓거리가 제 아무리 나쓰메 소세키라도 가능하겠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 얄팍한 경험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폭풍 질문이 몰아치는 회의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지금 상태는 마치 심지가 빠진 초 같았다. 


"왜 이 주인공은 여기에서 이런 생각을 하죠?"

"주인공이, 그냥, 매력이 없어..."

"상대방이 이렇게 빌런인데, 주인공이 3년이나 연애를 했다고 하면서 이렇게 모를 수가 있지?"


답을 해야 한다. 이 캐릭터를 만든 사람이 나니까, 그리고 쓴 사람이 나니까 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머릿속은 하얗다. 억지로 조목 조목 이야기는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억지 대답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대답의 근본이 좀 바뀌어야 했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야기는 사랑의 이야기다. 사랑은 숭고하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 사랑 밖에 난 몰라... 회의 중에 연세 있으신 분들은(그래봤자, 나랑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 하아~ 나도 이미 연세가 두둑한 것이다...) 이걸 외친다. 난 이 '사랑 밖에 난 몰라'가 끔찍하게 촌스럽고 싫다. 그런데도 자꾸 글을 쓰다보면 '사랑 밖에 난 몰라'가 떠오른다.  과연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제가 '사랑밖에 난 몰라'였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징그럽게 따라붙었던 애정의 결핍이 상황을 계속 엇박으로 개미소굴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고 느꼈다. 그게 너무 슬픈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슬픔을 효과적으로 회의 때 이야기해낼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사랑밖에 난 몰라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공부를 좀 해야 했다. 요즘은 사랑이 뭘까, 도대체 철학을 한다는 사람들의 사랑은 얼마나 고상한지 한 번 보자! 하며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새벽 독서 모임의 리더 선생님께 책 세 권 정도를 추천받았다. 그리고, 나 혼자 또 한 권 더 추가해봤다. 아주 우연찮게 다른 분의 서재 책꽂이 사진을 보다가 내 눈에 걸려든 책.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사랑 이야기에 전적으로 할애된 온갖 종류의 영화나 소설, 노래 따위가 왜 우리를 사로잡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저는 타자와 함께하는 행복의 원천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을 직접 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내 존재를 위해 네가 있는 그 원천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원천에 담겨 있는 물속에서 저는 우리의 기쁨을,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의 기쁨을 봅니다. 


뭔 말이냐. 

철학자가 쓴 책은, 즉 '철학책'이란 것을 나이 오십이 되어 각 잡고 처음 읽어보는 건데, 읽는 내내 계속 연필을 쥔 손이 좌우 앞뒤로 움직여진다. 나, 타자, 너, 존재... 수십 년 간 몰랐던 개념, 공부가 얕고 이해가 비루하여 계속 손으로 허공에 동그랗게 벤다이어그램 그리듯 그려가면서 이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읽다가 읽다가 모르겠으면 옆에 쓴다. '뭔 말이냐'



아, 마지막으로 컨디션 조절 방법 남긴다.  

핏빗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리고 강력한 카페인의 도움도... 

손목에 핏빗 워치를 차고 잠을 자니 확실히 다음 날 아침, 피곤함에 너덜거리는 날은 어김없이 컨디션 상태 '나쁨'이 뜬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일찍 자려고 한다. 물론 그간 내 인생의 가장 큰 적이었던 '와인'은 지금 조금씩 친구가 되어가고 있다. 너무 내 삶에 들이대지 말고 가벼운 반주 같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과도한 음주는 다음 날 새벽의 신비를 영접하는데 최고의 방해꾼이다. 내가 내 주량을 제일 잘 아니 알아서 일찍 잘 수 있는 양만큼 즐기다 잘 일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땀을 흠뻑 흘리도록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꽤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새벽의 신비'라고 거창한 말을 썼는데 이에 대해서 강렬하게 느낀 바를 한 번 소개해본다. 새벽이라는 시간은 다른 식구들이 모두 푹 잠 자고 나 혼자 깨어 있는 때인지라 오롯이 나의 시간이라는 느낌에 감격스럽기도 하지만, 그를 뛰어 넘어 뭔가 다른 새로운 에너지를 주는 시간인 듯하다. 

커피도 새벽에 마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 새벽 커피가 너무너무 맛이 있는 이유는 뭐라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느낌을 예전 6시 수영반에 다니면서 느낀 적이 있다. 매 순간 순간 내가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가는 느낌, 그것이 좋았다. 운동 선수들이 그렇게 간절하게 새벽 5시에 운동화끈을 꽉 고쳐 매는 이유를 알것 같았다. 


박해영 작가가 쓴 <나의 해방일지>. 나는 별로 감흥이 없는 드라마이긴 했다. 왜 경기도 사는 삼남매가 이렇게 툴툴거리는지도 이해도 가지 않고, 특히 막내 염미정과 같은 성격은 몹시 답답해 하는 터라... 게다가 그 더운 날에도 까만 가죽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 부채질 하는 꼴도 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구씨의 전직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아 이 작가 뭐야!!!!!!!!!!!!!!!!!!!! 밑바닥 인생을 그리는 것 겨우 그 정도 직업 밖에 생각 못 한단 말이야? 윌북에서 발간된 <캐릭터 직업사전>도 들춰보지 않은 터냐!! 소리를 지를 뻔...(물론 이 사전도 아무리 우리나라 실정에 맞춰 편집되어 나왔다 하더라도 아, 너무 북미, 양스러워서... 원...) 

그러나, 작가는 박해영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전반부 지루함 참아야 했다. 뒤에 가서 구의 정체도 자발적으로 납득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 드라마의 주제는 바로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저 깊은 땅 속에 '구원'이라는 묵직한 철학을 매립해놓았다. 

이러고 싶었던 것이다, 나도... 쫓아는 못 가도, 흉내는 내봐야 할 것 아닌가.  


벌써 밤 10시를 향해 가고 있다. 마무리짓고 자야 할 것이다. 물론 퇴고는 계속 될 것이다. 이렇게 쌩으로 써놓고 그냥 올릴 수는 없으므로... 

기획안 마무리는 내일 오전에 할 것 같다. 오늘 너무너무 작업하기가 힘들고 지루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8번째 쓰는 기획안이어서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되바라졌다고 읽힐 정도로 밝고 명랑한 어투로 쓰려고 많이 노력했다. 드라마는 내가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다. 광고 카피 쓰는 것처럼 철저하게 팀이 요구하는, 트렌드가 요구하는 것을 써야 한다. 웹소설도 업계 공식이 있다고 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너무 나를 잃으면 또 길을 잃는다. 중간점 잡는 것이 참 어렵고도 재밌다. 


정말 마지막으로... 새벽 독서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안 졸린다. 단 일찍 자야 한다. 


*** 대문 그림은...

러시아의 화가 발렌틴 시도로프의 <서리>

특히 여름 새벽의 파랑을 표현한 것 같아서 걸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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