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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Dec 28. 2023

악마의 편집

사람을 또 잃고 말았다

어딘가를 오며 가며 혹은 청소하거나 빨래를 갤 때 오디오북을 듣곤 하는데 자투리 시간 활용하는 데 참 유용하다. 영화나 드라마는 화면에 집중을 해야 하니 따로 온전한 시간을 내야 하고, 귀로만 들으면서 상상할 수 있는 오디오북은 나의 좋은 친구다.
오늘 아침 청소 때까지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밀리의 서재에서 들었다. 성우의 연기가 너무나 출중해서 진짜 박장대소하면서 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들을 책을 골랐다.
<프레임>



2007년, 2008년 경에 읽었는데, 저자가 서울대에 있다는 것만 기억 나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지라 눈에 띄자마자 다운로드 받았다. 개정판이라고 하는데, 이미 이것도 2007년 판이라고 한다. 

겸손한 학자의 마음으로 책을 정성껏 준비한 것이 이미 프롤로그부터 마음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 


학교 교정에 어떤 차가 비뚤어지게 주차가 되어 있었단다. 심지어 인도까지 침범해서 세워진 터라 사람들은 지나가면서 이 차 주인 누구냐, 개념도 없다 하면서 툴툴대더란다. 하지만, 저자는 이 차가 왜 이렇게 세워질 수밖에 없었는 지 저간의 사정도 알았고,  차주 또한 그렇게 개념이 없는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단다. 사정인즉슨, 이 차가 들어왔을 때는 이미 교정에 빽빽하게 주차가 되어 있어서 어디 하나 세울 데가 없었고, 차의 주인은 강의 시간이 점점 다가와서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지를 부린 것이 어느 차와 차 사이 난 공간에 (그리고 그 공간은 공교롭게도 인도에 걸쳐 있었고) 세운 것. 그렇게 달려가 가까스로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문제는...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문제의 양 옆 '차와 차'가 모두 빠지고 난 뒤였다. 두 차가 있었을 때는 이 주차는 '기지를 부린' 주차였는데, 차들이 떠나고 이 한 대만 덩그러니 남으니 '개념 없는' 주차로 전락을 하고 만 것이다.  양 옆의 차가 있었더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교내의 심각한 주차난을 이야기하면 혀를 찼을 것이다. 맥락은 이렇듯 중요하다.  

게다가... 이 차 주인은 바로, 저자였다! (나는 왜 이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듣자마자 뽜하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이처럼 프레임의 가장 빈번한 형태는 맥락으로 나타난다. 가끔 어떤 사람의 발언을 앞뒤 맥락 다 자르고 보도하거나 보여줌으로써 진위를 왜곡하는 악마의 편집이 문제가 되곤 하는데, 이는 맥락이 얼마나 강력하게 프레임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내 숙연해졌다. 우리는 사람 사정 안 봐주고 앞뒤 다 자르고 멋대로 보도된 것을 읽고, 듣고, 어머머머! 웬일이니!를 외치다가 그만 한 사람을 또 잃고 말았다.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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