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일 글을 다시 읽어보았더니만...
2022년도의 글을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같은 일, 오늘도 어제도 계속 똑같이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분석해봤습니다. 햇수로 벌써 3년 차 같은 짓을 반복하는데, 달라진 점이 없다고? 그럴 리가 없다 하고요. 자, 시작합니다!
지난 번 제출한 기획서가 한 마흔 장 가까이 되었는데, 완전 까였거든. 왜 그랬는지는 너무 알겠다. 성의도 없이 그냥 '초고'를 낸 거나 다름없었다. 정말 내가 왜 그랬나, 정신이 나갔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문장들 범벅이었다. 그걸 읽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내게는, 그 기획서 없으면 이제는 안되겠다.
나만 알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 모두, 창피한데,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와, 오늘 기억 못 할 일마저도 그 기획서 보면 다 들어가 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곳에 떡 하니 들어가 있어서 너무 귀엽고 웃기다. 그걸 쓸 당시에는 내가 (약간은 미쳤지만) 다른 방향으로 버닝을 했구나.
2023년 1월 22일의 나는 여전히 드라마 기획서를 쓰고 있다. 이 글을 쓸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이야기로 오물짝 조물짝대고 있다. 그리고 이번 버전의 기획서는 여전히 나에게 글이 앞으로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가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회의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아니할 수 없다.
열 살 때, 우리 반 까불이 남자애한테 들었던 나폴레옹 이야기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 주둔한 오스트리아 군과 싸우기 위해 병사들을 거느리고 피의 알프스 산맥을 넘은 이야기는 엄청 유명하다. 천신만고 끝. 한 봉우리에 올라가서 나폴레옹 외치셨다.
- 으아아~ 여기가 아닌가벼~
병사들은 얼마나 힘이 빠졌겠나. 그래도 죽을 힘을 다해 내려와서 다시 다른 봉우리로 올랐다. 그리고 까무러쳤다.
- 아까 거긴가벼~
회의의 가공할 신비랄까. 회의가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참석 인원이 많으면 많을 수록 결론은 맨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역시 방향은 처음 원작으로 돌아가고 있고, 나는 결코 까무러치지 않는다.
부디 우리의 모든 회의 과정이 '낙엽귀근(落葉歸根)'임을 증명해내고 싶을 뿐이다.
이 사자성어는 쉽다.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결국은 본래 나고 자랐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즉, 모든 일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한 피디님은
햇수로 2년이 지난 저번 주 제출한 원고도 여전히 마흔 장 가까이 되었다. 완전히 까인 것은 아니지만 수정할 부분이 있었다. 이번에도 퇴고를 흡족하게 거치지 못했다. 정신이 나갔다 싶을 정도의 이상한 문장들은 이제 많이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크다.
다행인 것은 기획서 제출 전에 그 아쉬운 부분이 내 눈에 들어왔다는 점이다.
지금 기획안, 각 화별 줄거리를 잡는 데에만 거의 3개월 다 된 것 같다. 지난 3-4년 동안 드라마 쓰겠다고, 혹은 내 오리지날 작품을 쓰겠다고 언저리를 계속 돌면서도 그 내핵을 돌파하지 못했던 까닭을 정확하게 알았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자서전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글쓴이와 주인공이 완전하게 분리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창피한 일이 수두룩하게 벌어질 것이다.
일단 쓴 사람이 몹시 낯뜨겁고, 보는 사람은 "그래서 뭘 얘기하겠다는 거야?" 이 소리가 바로 발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자꾸 작가랑 주인공을 같은 인간으로 놓고 쓰니 계속 넘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넘어지면서 수 년이 흘렀다. 지나고 보니 응당 거쳐야 했을 기간이다.
몇 개월 쓰다가 "아, 나 감잡았어!" 이게 쉽게 되지 않는다.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조금 '아 이제는 어디쯤 가면 넘어질 것 같아.' 하고 알게 되었다.
(또 모른다. 한 일 년 지나고 나서 아아, 2022년 12월 15일의 황섬은 진심으로 애송이었구나! 하고 느낄지...)
위에서 '이렇게 넘어지면서 수 년이 흘렀다'고 한 이야기는 드라마 기획, 완전히 첫 단계부터의 이야기다.
술자리에서 2차로 간 집, 그 자리는 내가 그만두겠다고, 안녕히 계시고 번창하시라는 이메일을 남기고 나서 그래도 마지막으로 회나 한 접시 먹자며 만났던 자리였다. 맥주를 한 잔씩 시켜서 먹고 있는데, 대표님께서
(정말 고마운 분이다. 이제 그만 두는 사람 일부러 나오라고 해서 그 비싼 방어를 사주시다니!)
그렇게 1년 정도 지나고, 감독님이 합류하셨고, 또 1년이 지난 시점이었던 듯하다.
글쓴이와 주인공이 분리가 되는 과정은 진심으로 지난했고, 그에 따라서 주인공 설정이나 이야기의 배경 등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변천했다. 불륜학 개론 강사, 이혼 변호사, 이혼 도우미 소장, 타로 마스터 등등...
결론적으로 그때 쓴 것과 같이 2022년 12월 15일의 황섬은 애송이였던 것 같고, 2024년 1월 22일의 황섬 또한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좋은 스토리텔러가 나 말고 한 사람 이상 주변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내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바를 정확하게 캐치할 줄 알아야 하고, 방향성도 같은 쪽이어야 한다. 나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사람과 작업 백날 해봤자 결코 이야기 쌓아갈 수 없다.
우리 모두 사람인지라, 기본적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내게 10을 협조하라고 하면 그 반, 반의 반도 협조할 여력과 에너지를 갖추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 또한 중요한데... 말할까 말까 하다가 말씀을 드려본다.
내가 머리 돌아가는 속도와 비슷한 속도로 돌아가는 사람이면 금상첨화다. 나는 너무 빨리 돌아가는데, 옆의 조력자가 "아부지~ 돌 굴러가유~" 하고 있으면 속 터져서 그 팀은 급속히 파괴될 것이다. 혹은 조력자는 지금 다람쥐 뛰듯 튀어서 앞으로 가는데, 쓰는 사람이 머엉~ 하며 허공만 바라보고 있어도 같은 짝이 난다.
나는 오늘도 새까만 우주를 무중력 상태에서 뱅글뱅글 돈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 안으로 화별 줄거리는 끝내야 한다는 (나 혼자만의 마감으로 인한) 압박감이 있는데,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와 긴장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진도를 죽죽 뺄 수 없었다. 중간에 참고할만한 책도 잔뜩 쌓아놨지만, 마음이 급하니까 제대로 찬찬히 짚어 읽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돌아가는 스토리들을 이렇게 먼저 그래프로 그려서 시작하면 화별 줄거리 잡기가 좋다. 그리고, 먼저 손글씨로 마음껏 아무 위치에라도 써서 정리한 후 다시 노트북으로 옮겨 적는다.
스크리브너가 브레인 스토밍 단계의 이런 기능을 충실하게 해준다고는 하는데, 지금의 나는 '옛날 사람'인지라 배워서 써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이번 작품까지만 한글로 쓰기로 작정했지만, 나중에 화별 기획안 통과되면 그때가서 독하게 맘 먹고 하루 시나리오 쓰는 법 배워서 적용해보려고 한다.
물론 한글에서 내가 기존에 쓰던 매뉴얼이 있긴 한데 그냥 '요즘 사람'들에게 막연하게 뒤지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다. 이렇게 좋다는 신개념 병기들이 나왔다는데, 그걸 못 써보고 죽으면 억울하지 않겠나.
나의 의견에 반기를 들기만 하는 사람과 작업하면 백날 진도 안 나간다는 데에는 아직도 유효하다. 이것은 작업자의 인성과는 다른 문제다. 효율의 문제이다. 내가 낸 의견을 계속 끌어앉히는 사람하고 일하면 아마 마음의 병부터 걸리고야 말 것이다. 사람의 뇌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인지라, 백 프로 내가 틀린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나는 스크리브너를 쓸 줄 안다. 작년 늦가을 스크리브너에 버닝해서 열심히 배웠고, 이번 기획안이 마무리되면 스크리스브너 메모장부터 시작해서 가동할 계획이다. 아직까지 기획안은 한글 파일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까지는 한글이 내 손에 더 편안하긴 한데, 스크리브너의 신세계를 놓칠 수가 없다.
특히 대본을 쓰고 있거나 배우고 있는 여러분들이라면 스크리브너를 꼭 배워두시기 바란다.
https://alook.so/posts/xltJbpv?utm_source=user-share_r9tXon
이분의 얼룩소 강의 한 방이면, 우리들은 스크리브너로 입문 쌉가능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전, 아마도 얼룩소의 이기원 작가님(아, 얼룩소의 이기원 작가님 이전에 '하얀 거탑'의 이기원 작가님으로 더 유명하시다) 강의를 한 서너 번은 다시 돌아와 읽게 될 것이다. 그냥 얼룩소 1위 작가님 된 것이 아니다!
저 이야기 진행 그래프를 그리며 도움을 받은 책은 <캐릭터 아크 만들기> (K.M.웨일랜드 지음/경당)와 내 마음 속 스토리 구성, 최고의 경전(?)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크리스토퍼 보글러 지음/비즈 앤 비즈)다.
내가 쓰는 방법은, 내 머리속의 스토리에 책을 읽는 내내 시험 문제에 답하듯이 대입한다. 이야기가 여러 번 뒤집어지다보니 책들에 많이 낙서가 되어 있다. 이상하게 이런 구성을 잡을 때 도움이 되는 책들은 다 읽고 나서 덮으면 또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음 시나리오나 대본 들어갈 때 다시 보고, 또 보고 해야한다.
오늘은 손글씨로 1화부터 10화까지 화별 줄거리,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에피소드 잡는 것을 1차로 끝냈다. 이런 기본 줄거리에 매 화별로 녹여 넣어야 할 내용들, 예를 들어서 화별로 주인공이 강의하는 내용의 골자를 구체적으로 정한다거나 주인공이 덕질하는 대상(그것이 음악이든, 음식이든, 그림이든, 혹은 김연아든, 손흥민이든 다 좋다!)이 에피소드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작업이 후반에 추가될 것이다.
쓰다보면 자꾸 긴장이 되고, 그러다보니 노트북에서 내 손가락이 잘 뛰어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중간에 끊고 이렇게 브런치에 기록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SNS는 반응이 제깍제깍 오는지라 다른 글작업들에 비해 덜 외롭다. 그리고, 확실히 내 색깔을 내며 까불수 있다. 너무 까불면 또 잡아끌어내려야 하지만.
요즘은 법륜스님의 반야심경을 손에 잡히는대로 펴서 읽는다. 나는 칼 융이 이야기하는 '동시성의 원칙'을 믿는다. 매 순간 나에게 벌어지는 현상은 내게 분명히 어떤 유의미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믿음. 그래서 점괘 뽑듯이 아무 쪽이나 펴서 읽어보고 그 구절이 내게 보내주는 메시지를 곱씹어보곤 한다.
<오늘의 말씀> 2022.12.2.
수행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바른 가르침을 만나 법의 이치를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 아닙니다. 언하言下에 깨치기도 하고 3일이 될 수도 있고, 석 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3년 안에는 꿰뚫어 알아야 합니다.
'3년'의 의미가 뭘까. 오늘은 생각해본다. 3년의 의미.
햇수록 3년이 된, 오늘은 기필코 마지막이 될 기획안 초고를 작성 중이다. 이번에는 짧게 다섯 장이라도 줄여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장은 무리이고, 열 장 내외에서 끊을 예정이다.
이런 귀한 '깨달음'을 얻고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잘 안 되는지 모르겠다.... 황무룩....)
이야기 후반 3분의 2는 '신비한' 음식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 중간 중간 음식 공부도 많이 하고 있다.
그 음식 공부의 결과물 일부가 바로 브런치북 <황섬의 어글리 딜리셔스>이다.
https://brunch.co.kr/brunchbook/uglydelicius74
덧붙여 지난 버전의 기획안에는 '타로 마스터'라는 캐릭터 특징을 함께 가져가려 했는데, 일단 이번 드라마에서는 걷어냈다. 그리고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본다.
나중에는 본격적인 타로 마스터의 이야기를 꼭, 꼭, 꼭 기획해서 쓰고 싶다. 영화든 드라마든... 분명히 근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타로와 별자리와 연금술의 신비로 우리를 에워싸줄 멋있는 작품을.
<오늘의 말씀> 2024.1.22.
무등등無等等은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그 무엇과 비교해도 같을 수 없으며, 깨달음은 그 어떤 경험과도 비교되지 않는 위대한 체험입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 다시 말해 중득證得은 실천을 통해 내가 경험한 완벽한 깨달음을 말합니다. 믿음도, 지식도, 실천도 낸 스스로 경험하여 중득해야만 궁극적으로 진리임이 증명됩니다.
아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