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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Jan 24. 2024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거라는 착각

YWCA에서 소년원에 있는 청소년들과 1대 1로 연결해 줘서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교환하고 있다. 처음에 이런 소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참을 고민했다. 섣불리 잘못 뛰어들었다가 안 그래도 마음에 상처 한 번씩 입은 아이들 또 아프게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어제는 심리 상담 두 번째 날이었다. 

이 편지에 그 이야기들을 고스란히 담았다. 중학생, 어린 친구라 내 얘기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을 했는데, 이 친구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보면 충분하겠다는 판단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쓰기 시작. 
이렇게 만년필을 쥐고 손 호호 불어가면서 손글씨는 진짜 오랜만이다. 


나라는 사람이 100%라고 하면 그 중 좋은 사람 97%가 있고, 안 좋은 모습 3%가 있다. 

선생님은 5%라고 예를 들어주셨는데, 내가 3%로 줄였다. ㅋㅋㅋ 여하튼 나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 3%가 바로 나의 트라우마다. 나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아주 나중에, 어느 정도 나는 '객관화'할 수 있게 되면 풀어보겠다. 아직은 아니다. 설 익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너무나 많이 들어본 단어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얼마나 검색이 많이 되었는지 PT만 쳐도 Personal Training보다 먼저 이 단어가 나온다. 

사람이 살면서 절대 겪고 싶지 않은 일을 당한 후, 그 뒤에 남는 스트레스로 인해 벌어지는 몸과 마음의 격한 반응들을 가리킨다. 타고난 성정에 따라 이것이 즉각 반응하여 올라오는 경우도 있고, 나도 모르게 오랫동안 쌓여 나이들어 보이기도 한단다. 


이 3% 정도의 '분노 버튼'이 눌러지면 집에 다 있는 두꺼비집 시스템 처럼 나머지 97%의 좋은 사람이 다 꺼져 버린다. 시커멓게... 

이 3%와 관련된 뇌의 부위가 바로 '편도체'와 '해마'라고 한다. 

작년 가을부터 열 올려 들었던 김주환 교수의 강의에서 수백 번 들었던, 바로 그 부위다. 


https://youtu.be/lJqypKOO9q0?si=CqVdfaJ3-7SqRIl1


이 편도체가 흥분이 되어 있으면 다른 뇌의 기능들이 퓨즈 끊어지듯 하는 것. 나의 3%를 가지고 충조평판 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이 아주아주 많이 하는 일이다. 나도 아마 이 3% 때문에 어떤 사람이 싫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다행인 것은 나머지 좋은 사람 97%를 다시 밝히기 위해서는 두꺼비집처럼 레버를 올리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3%의 퓨즈를 점점 가늘게 만들고 다른 좋은 사람 퓨즈를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면 된다. 물론 쉽지 않다. 


선생님은 상담하면서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거라는 착각 속에 산다'는 박찬욱 감독의 말을 인용한 내 페이스북 글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페이스북 안 하고 있지만 몇 날 며칠, 맨 위 상단에 버젓이 올라간 글이다. 


- 그런 생각하고 살면 안 돼요? 나는 그 글이 너무 좋았는데... 


그리고, 분명히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는 그 믿음이 대단한 일을 하게 만든다. 이런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한다. 주변에 좀 주책스러울만큼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 있다. (나를 포함해서...) 그런 사람들이 일을 내도 꼭 낸다. 조용히 물 밑에 있다가 멋있게 정상에 등극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뒤늦게, 이 두꺼비집의 레버가 쿠궁~! 내려와서 마음의 불이 다 꺼지면 그때마다 다시 올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 너무나 행운인 것이 나의 좋은 사람 97%를 알아보는 몇몇 이들이 있어 막판 뒤집기를 감행할 수 있어서다. 

'감정'과 딱 붙어있는 나를 점점 떼어서 건강한 '틈'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외상 후 성장'이라는 용어가 있다. 

요즘들어 심리학과 논문에 엄청 많이 인용되는 용어라고 한다. 

보통 괴로운 일이나 극심한 감정의 결핍이 있고 나면 나락으로 뚝 떨어져 버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디딤돌로 한 단계 점프한다고 한다. 

나의 선택은? 당연히 점프다! 


작년 12월부터 1월의 말로 가고 있는 지금까지 정말 좋은 일이 크게 두 번 정도 다가왔고, 마음이 안 좋은 일들도 연속으로 천둥 번개 치고는 있다. 심지어 어제는 상담받고 오면서, 1991년 16살 때 처음 운전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백프로 과실 추돌을 해버렸다. 경동시장 앞에서 멍하게 롯데 캐슬 아파트의 화려한 불빛을 바라보다가 꽥! 소리지르면서 뭣에 홀리듯 사고를 낸 것이다.

올해 들어 최고의 추위였는데, 그 칼바람 속에서 한두 시간 정도 사고 처리를 하고 집으로 털레털레 들어왔다.  

큰 일이야 났지만, '내 인생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잠들었다. 이 모든 것이 이상하게 내 인생이 개편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 좋은 때 지나면 뭔가 새로운 지평이 떠오르겠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겠지. 



오사카에 사는 내 친구가 일갈했다. 명언이다. 

내 새끼들한테 못 보여줄 글이라면 어디든지 안 올리는 게 맞다고. 

지혜로운 sns 생활의 첫 걸음이다. 


그리고 이 편지를 받는 친구, 꼭 퇴원하고 주눅들지 말고 힘차게 학교 생활 했으면 좋겠다. 

애들 눈빛, 낙인, 힘들겠지만, 정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 사랑하고... 

퇴원하고도 나와 편지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데, 정체를 알면 내가 아마도 할머니 뻘이어서... 미안하다. ^^



아아... '갈구'라는 단어 지워! 지워! ㅋㅋㅋ 중학생에게 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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