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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14. 2024

장기전세주택 서류. 심사. 대상자.

당첨은 언젭니까!

어쩌다 보니 전세로 살게 된 것도 한 집에서 벌써 한 7년 됐다. 


솔직히 집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면 낫살 좀 된 요즘은 조금 창피한 것이 사실이다. 40대까지야 그래, 먹고 사느라 바빠서 내 집 한 칸, 내 땅 한 마지기 구할 새도 없었다고 치자. 

이제 내 나이도 반백 살을 넘어가고, 내 자식 뻘의 젊은 사람들도 재테크를 얼마나 잘하는지 다들 자기 앞길, 자기 몸 누일 집 하나씩은 '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는 아직도 장기전세... 

그래도 '미성년자 자녀 둘'이라는 '혜택'을 등에 얹고, 한 번 들어가면 20년은 마음 놓고 전세 살 수 있다는 장기 전세주택 서류 심사 대상자가 되었으니 정해진 기한 안에 서류를 제출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서류 심사 대상자'는 실제 당첨자의 세 배수 정도로 뽑아 놓고 심사한다. 이 중에서 서류상의 사실과 다를 바는 없는지, 혹시 다른 결격 사유는 없는지 살피고 차 떼고 포 뗀 뒤 추첨한단다. 

게다가 나는 '설마 내가 되겠어?' 하는 마음으로 꼼꼼히 잘 안 보고 그냥 아, 그 동네 알아... 하면서 청약을 넣은 것이었는데, 이후 이번 43차 장기전세주택 관련해서 유튜브를 보니 맙소사! 

이번에 내가 신청한 집은 그대로 장기전세 계의 호화 펜트하우스 급이었던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방문 열면 문지방 페인트칠한 것이 떨어져 하얀 조각으로 날리는 작은 집에 살다가 갑자기 드레스룸이 있고, 파우더룸까지 (드레스랑 파우더랑 기능이 다른 점을 이야기해 주시오!) 딸려 있는 집, 한 집에 살면서 싸워서 꼴 보기 싫은 사람 있으면 출입문을 달리 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획기적인 집에 살면 

아아, 얼마나 좋을까!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아, 나도 좀 겨울에 외풍 안 들어오는 집에 살아보자.  


https://brunch.co.kr/@chocake0704/191


여전히 마음은 복잡하다. 

막상 덜컥 된다면, 아무리 저렴한 가격에 들어갈 수 있는 전세라 할지라도 중간에 비는 이 돈은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게다가 아직 초등학생인 아들 전학시킬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성격은 엄청 활달하고 착한 녀석인데 자폐에다가 언어장애까지 있어서 특수반이 있는 학교여야 한다. 


모든 일은 다 닥치면 하겠지만... 

이럴 때는 그저 순리대로 따르기.  

이 집 안 된다고 해서 길바닥에 나앉는 것은 아니니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에 정말 힘든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8년이나... 게다가 내 성격, 기질적 특성으로는 절대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을 '꽃'이라고도 한다. 

그게 무얼까? 

바로 '보험 영업'이다. 


8년 동안 보험 업계에서 일하면서 모신 고객이 100명도 안 된다. 일 진짜 '더럽게' 못했다는 이야기다. 

(130명 정도가 넘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시 세 보니 한 사람이 2~3개 보험 가입한 것이었다) 

물론 나는 이 기간 동안 반은 영업 조직에도 있었지만 반 이상은 본사 교육부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냈다. 

요즘 sns에서  한참 불꽃이 튀는 분야를 아주 마이크 하나 붙잡고 사람들 다 속여먹였다. 

자기 계발 분야, 돈 공부, 퍼스널 브랜딩... 

왜 '속여먹였다'는 인상 찌푸려지는 단어를 썼느냐면 실제로 나는 저 세 분야에 젬병이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가르침을 전수한 것이 부끄러움을 넘어 조금 수치스러워서 그렇다. 


자기 계발을 하기에는 루틴을 좋아하지 않는 자유인이었고, 돈 공부는 또 말하면 입 아프고, 퍼스널 브랜딩도 그냥 입만 나불거릴 뿐, 나는 결코 다듬어지지 않은 인간이었다. 

자격증만 따 놓으면 뭐에 쓸 건지... 



그래도 이 시간 동안 참말로 참말로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활시위를 당겼다 놓으면 화살이 어디로 갈 것인지는 신경 쓰지 말 것. 

대신 시위를 당길 때까지는 초집중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지되, 

화살이 날아가고 난 뒤 그저 결과는 하늘에 맡길 뿐이다. 

아무리 성품이 좋은 고객을 만나고, 내가 백 번 천 번 설명을 잘해드리고, 자료 준비까지 꼼꼼하게 잘해간다고 한들 청약서에 도장 찍는 것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다. 고객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끝까지 내 설명 잘 들으시고 수백 번 고개를 끄덕이셨던 분들이 거절도 예쁘게들 잘하신다.


그런데도 나는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영업을 했던지...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내 마음에는 바로 먹구름이 드리웠다. "네, 오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다시 태양이 찬란하게 떴다. 

지금도 이 문장을 쓰면서도 조금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 "네 오세요."라는 말은 고객이 적극적으로 나를 필요하다는 멘트가 아니어서, 그 뉘앙스를 이제는 알아서 그렇다. 


그래서 나는 보험 영업 오래 하신 분들, 존경한다. (영업하면서 돈 장난친 사람들은 당연히 제외다) 그 세월 동안 많은 것을 몸소 현장에서 부딪치고 배운 이들이다. 

친구들에게 욕도 먹었을 것이다. "넌, 나한테 오랜만에 연락해서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라는 말은 당연히 들었을 터. 앞으로 못 들었다면 뒤로 날아왔을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갑자기 안도현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그 누구라도 한 번이라도 이리 처절하게, 욕먹을 것도 다 알고, 염치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고 전화기의 버튼을 치열하게 눌러는 봤는지. 

'나는 그런 사람 아냐' 혹은 '나는 절대 그런 일 못 해.'하고 한계를 두는 이들은 바라보지 못하는 세상, 절대 하지 못할 일, 바로 보험 영업이었다.  



아무튼 지금, 내가 할 일은 오직 이것. 

장기전세주택, 내가 신청한 곳의 주변 초중학교 알아보기, 제출 서류 빠지지 말고 찬찬히 준비하기, 그리고 보내기.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니까. 하늘에 맡긴다.  

이렇게 쓰면서도 삶에 대한 이러한 태도, 참 실천하기 쉽지 않도다! 

그놈의 미련이라는 조미료가 자꾸 뿌려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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