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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15. 2024

파괴당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기에

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만년에 쓴 소설이다. 200번을 고쳐 썼다고 전해진다. 헤밍웨이가 실제로 그 말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고는 모두 쓰레기다'라는 말에 아주 걸맞은 일화다. 


초로의 노인 산티아고는 쿠바의 한 바닷가에 혼자 살며  작은 배를 몰고 다니는 어부다. 이미 84일이나 고기를 낚지 못한 어부. 젊은 시절 그는 힘도 세고, 솜씨도 최고였다고는 하지만, 이제 운이 다 한 건지, 기력이 쇠한 건지 한 달이 넘게 빈손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의 뒤에 대고 비아냥댄다. 단, 그에게 낚시를 배운 소년을 제외하고. 그러나, 소년마저도 엄마가 와서 데려가버린다. 


노인은 전설의 야구스타 조 디마지오의 팬이고, 밤마다 사자를 쫓는 꿈을 꾼다.  

여기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한참을... 

헤밍웨이는 노인에게 '야구하면 양키스'라며 야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는 입체적인 설정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밤마다 사자 꿈을 꾸게 해 주었다. 

너무나 뻔하지만, 이렇게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서 있게 하는 설정이다. 

이것이 대가의 노련함일까. 노인이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들이 노인을 끌고 가는 강력한 모터가 될 것이라는 뻔한 설정이지만, 이는 몹시 중요하다. 

노인에게도, 읽고 있는 내게도...

현실은 시궁창, 물고기 한 마리 못 잡는 비루한 일상이지만 침대에 누워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노인은 사자를 좇는다. 


어느 날 노인은 바다 한복판으로 들어가 드디어, 사투 끝에 또 한 채의 배만 한 청새치를 잡는다. 이렇게 수개월의 스코어 빵 행진을 끊는가 했는데... 

여기에서 순순하게 마을로 돌아와 승전보를 울렸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이제 좀 남은 고기를 가지고 가려나 하면 또 상어가 몰려오고, 좀 끝났나 싶으면 어두운 밤 감각만으로 몰려온 상어 도적떼들을 때려 도망가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문을 받아 한 쿠션, 두 쿠션 그걸 잘 녹여서 써야 하는 일을 오래 했다.  

카피 라이터. 나중에 작가라고 불리게 된 다음에도 내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먼저 '고스트라이터'로서 작가로 책 표지에 이름이 걸릴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를 토대로 책을 쓰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분노'가 많이 쌓이기도 했었다. 일부, 아주 무식한(!) 클라이언트 글도 다 받아서 무조건 써야 하니까. 

예를 들어 파스퇴르 광고 쓸 때는 삼원색을 알록달록 다 써야 했던 디자이너의 참담함... 이해한다. 

대기업은 중간에 감각 있는 사람들이 다 거른다 하더라도 대충 큰 회사들은 대표가 욕심이 너무 과하니까 힘들었다. 


그래도 이때 경험이 드라마, 영화 쓰면서 정말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듣고 녹여내려고 하는 몸짓, 이걸 20년 전에 광고회사에서 배웠다. 소설가의 일과는 조금은 결이 다르다. 

여하튼... 아무리 과한 요구라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넓게 넓게 펼쳐서 녹여낼 수 있는 노력. 이것을 함께 일하는 분들이 알아주신다면 정말 기쁠 듯하다. 

한 시간 뒤 회의가 시작된다. 대본으로 넘어가야 한다. 일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다랑어 한 마리, 실한 놈으로 잡아왔으면... 


노인은 사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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