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만년에 쓴 소설이다. 200번을 고쳐 썼다고 전해진다. 헤밍웨이가 실제로 그 말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초고는 모두 쓰레기다'라는 말에 아주 걸맞은 일화다.
초로의 노인 산티아고는 쿠바의 한 바닷가에 혼자 살며 작은 배를 몰고 다니는 어부다. 이미 84일이나 고기를 낚지 못한 어부. 젊은 시절 그는 힘도 세고, 솜씨도 최고였다고는 하지만, 이제 운이 다 한 건지, 기력이 쇠한 건지 한 달이 넘게 빈손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터덜터덜 걸어오는 그의 뒤에 대고 비아냥댄다. 단, 그에게 낚시를 배운 소년을 제외하고. 그러나, 소년마저도 엄마가 와서 데려가버린다.
여기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섰다. 한참을...
헤밍웨이는 노인에게 '야구하면 양키스'라며 야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는 입체적인 설정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밤마다 사자 꿈을 꾸게 해 주었다.
너무나 뻔하지만, 이렇게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서 있게 하는 설정이다.
이것이 대가의 노련함일까. 노인이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들이 노인을 끌고 가는 강력한 모터가 될 것이라는 뻔한 설정이지만, 이는 몹시 중요하다.
노인에게도, 읽고 있는 내게도...
현실은 시궁창, 물고기 한 마리 못 잡는 비루한 일상이지만 침대에 누워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면 노인은 사자를 좇는다.
어느 날 노인은 바다 한복판으로 들어가 드디어, 사투 끝에 또 한 채의 배만 한 청새치를 잡는다. 이렇게 수개월의 스코어 빵 행진을 끊는가 했는데...
여기에서 순순하게 마을로 돌아와 승전보를 울렸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들의 공격이 시작된다.
이제 좀 남은 고기를 가지고 가려나 하면 또 상어가 몰려오고, 좀 끝났나 싶으면 어두운 밤 감각만으로 몰려온 상어 도적떼들을 때려 도망가게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주문을 받아 한 쿠션, 두 쿠션 그걸 잘 녹여서 써야 하는 일을 오래 했다.
카피 라이터. 나중에 작가라고 불리게 된 다음에도 내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먼저 '고스트라이터'로서 작가로 책 표지에 이름이 걸릴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를 토대로 책을 쓰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분노'가 많이 쌓이기도 했었다. 일부, 아주 무식한(!) 클라이언트 글도 다 받아서 무조건 써야 하니까.
예를 들어 파스퇴르 광고 쓸 때는 삼원색을 알록달록 다 써야 했던 디자이너의 참담함... 이해한다.
대기업은 중간에 감각 있는 사람들이 다 거른다 하더라도 대충 큰 회사들은 대표가 욕심이 너무 과하니까 힘들었다.
그래도 이때 경험이 드라마, 영화 쓰면서 정말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잘 듣고 녹여내려고 하는 몸짓, 이걸 20년 전에 광고회사에서 배웠다. 소설가의 일과는 조금은 결이 다르다.
여하튼... 아무리 과한 요구라도 어떻게든 받아들이고 넓게 넓게 펼쳐서 녹여낼 수 있는 노력. 이것을 함께 일하는 분들이 알아주신다면 정말 기쁠 듯하다.
한 시간 뒤 회의가 시작된다. 대본으로 넘어가야 한다. 일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오늘도 바다로 나간다. 다랑어 한 마리, 실한 놈으로 잡아왔으면...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