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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23. 2024

굿인가. 쑈인가.

1탄

2011년도,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빚을 내어(?) 굿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네 사람들이 '살기가 힘들다'고 할 때는 돈이 없거나, 어떠한 연유로 혹은 연유 없이 우울할 때가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나는 그 시절, 전자의 이유였다.

'돈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경제 개념, 진짜 오지게 없던 터라 직장 다니면서 받은 월급은 늘 모자랐다.

아홉 살, 열 살 때 쓰던 용돈 기입장도 늘 죄책감이 들어서 쓰다가 때려쳤다. 맨날 적자 나는 놈의 세상... 이걸 그때부터 알게 된 듯. 엄마는 다른 어른들에게 나와 동생을 비교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재석이(내 동생)는 용돈을 주면 늘 남겨. 그걸 모아서 자기 사고 싶은 프라모델 이런 걸 사요. 그런데 우리 하나(내 본명)는 맨날 모자라."

게다가 당시 상황도 나를 계속 궁지로 몰고 갔다. 따지고 보면 한 번 결혼하면 드는 돈이 얼만데, 나는 세 번, 네 번을 하고 자빠졌으니 버는 돈에 마이너스가 나는 건 당연했다.

생긴 것은 영업 진짜 멋있게 잘 하게 생겼(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하는 일이 영업의 꽃이라는 보험 영업이었는데 일을 진짜 못했다.

어쩌다 모신 고객이 겨우 시간을 내어 상담을 하러 오면 나는 '보험이나 들게 하려고 당신을 만난 것이 아니다'라는 개소리를 시전하며 헛발질을 해댔다. 고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계속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던져 정면승부 하지 않고 볼 넷으로 고객을 출루시켰다. 그러니 당연히 버는 돈이 없지.

그 무렵이 내 오십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세상도 잘 모르고, 안 좋은 일은 계속 닥치는데, 머리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낼 길도 없고... 이혼 해서 딸 하나 달랑 데리고 다시 친정으로 들어왔는데, 골방에 찬바람이 숭숭 밀고 들어왔다. 여섯 살이었던 아이는 방바닥은 뜨거워서 자면서 땀은 뻘뻘 흘리는데 강한 외풍을 때려 맞아 계속 감기에 걸려 있었다. 늘상 코맹맹이 상태...

하루는, 갚을 날이 아주 길~게 남은 내 차를 몰고 가다가 '그린 슬리브즈'라는 아일랜드 민요를 들었다. 그냥 그 길로 펑펑 운 적도 있다.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니던 시절.

https://youtu.be/twix9KfES9Y?si=RuEPbR18IhHQiOF3


이쯤에서 잠시 쉬면서 이 구슬픈 노래를 들어보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오르골에서 흘러나온 멜로디이기도 하다.


여하튼, 돈이 없다면서, 마지막 마른 수건 짜내듯 빚을 300만 원을 내서 굿을 했다.

그때 굿의 총 비용이 600만 원. 다음 달 살아야 할 생활비 300만 원에 더해서 300만 원. 이렇게 돈을 마련한 것이다. 진짜 뒤로 한 발짝 물러섬 없이 영끌해서 갖다 바친 셈이었다. 

굿만 하면 지금 하고 있는 영업, 아주 잘 해낼 것만 같았다. 분명히 의정부의 그 무당은  나에게 이번 굿 하면 술술 풀릴 거라 했다. 그거라도 붙들어야 하루, 이틀을 버텨 살아나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완전 '미친' 아이디어였지만 말이다.


여기저기 돈을 꿔서 불러준 계좌에 입금을 하고 당일이 됐다.

아주 컴컴한 새벽부터 무당집에 가서 앉아 있었다. 늘 내 점사를 봐주던 그 무당 분은 그 새벽에 아침밥을 지어서 내주었다. 뭐라도 빈 속 채우라고. 난생 처음 해보는 굿에 긴장이 된지라 별 먹을 생각도 없어서 뜨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바로 옆 상에서 어린 무당, 진짜 스무 살이나 됐나, 그 어린 무당이 쪽을 지고 츄리닝을 입고는 돈까스를 집어 먹으며 '아이 맛있다, 진짜 맛있다' 이러며 먹고 있었다. 바로 앞에는 머리 파마를 빠글빠글하게 한, 그녀의 아빠 뻘쯤 되어보이는 박수께서 앉아서 밥에 물을 말아서 먹고 있었다. 그 광경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 어린 무당... 이것 저것 오물오물 먹고 있는데, 고 입도 귀엽고...어쩌다가(참, '어쩌다가'라는 단어 쓰기는 싫은데 마음이 그렇게 쓰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었을까. 신의 손에서 벗어나 구름 타고 다니며 신나게 한 생 살 것을... 




동이 트고, 이제 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상도 제삿상 한 세 개, 네 개는 이어 붙여 차려진 지라 입이 쩍 벌어졌다.

부엌에서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고 분주하게 준비하느라 덜그럭거렸던 그 의정부 보살, 무당분도 정식으로 무복을 갖춰 입고 나왔다.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계속 꽹꽹대고, 말하자면 이날 굿판의 프레젠터인 박수무당 아저씨께서는 북을 쥐셨다. 그리고 뭐라 뭐라 말을 하면서 타령을 한다. 지금도 그 비음 섞인 무속인 프리스타일 랩, 리드미컬한 북소리에 적셔져 공기에 축축 걸쳐 나갔던 '접신 랩'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처절하게도 축축히 젖은 소리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절을 하라 시키면 계속 절을 했다. 눈물이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상들 위의 화려한 음식들, 오방색의 천 조각들, 축축한 음악들... 완벽하게 나만을 위한 무대, 잔치였다.

게다가 우아한 유럽의 궁정 무도회처럼 테이블 위에 촛불은 왜 또 이렇게 많이 켜준 것인지. 고맙게... 고마웠다.

지금도, 이 글 한 줄, 한 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때 나를 위해 굿을 도와주러 와주었던 남자 여자 무당들 여섯 명, 다 기억이 난다. 너무나 고맙다. 


특히 아침으로 돈까스를 맛있게 먹었던 그 어린 무당...

한복을 맵씨있게 입고 나와 쭈뼛거리지도 않고 내 앞에서 무속인만이 해줄 수 있는 공연(?)을 보여주었다. 울다가 웃다가 그리고 신에게 빌다가... 곡비와도 같은 구슬픈 소리를 내기도 하고 깔깔깔깔 웃기도 하고 말이다. 장관은 긴 광목 천을 아주 강물 건너 가듯이 쫘아아악 찢고 전진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다른 색 천들도 길게, 또 길게 벅벅 찢어대며 앞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저 무당은 굿이 없을 때는 뭘 하고 살까. 친구들하고 뭐 하고 놀까. 사랑은 할까. 


그러던 중에 내 점사를 봐주던, 이 굿을 주관하는 무당께서 무채색의 한복을 입은 두세 명의 부축과 도움을 조금 받더니만 갑자기 방방 날기 시작했다. 펄쩍 펄쩍 뛰었다. 북과 꽹과리 소리는 점점 고조되었다. 

아니 그렇게 뱃살이 산타클로스 만한 초비만 아주머니가 기를 쓰고 하늘로 뛰어 오르다니!

나는 이 쑈인지 아닌지 모를 장면을 지켜보면서 계속 두 손을 왕파리처럼 싹싹 비비면서 빌고, 또 빌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나를 위해 땀을 흘리며 기도해주고 신과 만나게 해주려고 하는데 잘 될 거다, 정말 잘 될 거다.


이 굿을 치르고 난 뒤 내게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어제 같이 오늘도 하루 하루 계속 힘들었다.

그러나, 이날 굿 한 것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도 순간 순간, 장면 장면 저며서 생각하면 눈물이 날만큼 여러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주었던, 나를 위한 잔치가 바로 굿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것만으로도 치유였다. 비싼 돈 주고 치른 잔치.




이날 만났던 그 어린 여자 무당은 너무나 내 뇌리에 남아서 굿을 하고 난 7년 후인가 8년 후 겨울 <쑈쑈쑈>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썼고, 주인공으로 남았다. 이 시나리오는 너무 초짜 때 쓴 것이라 구성도 단순하고, 뒷심도 판판이 부족이지만 절대 포기할 아이템이 아니다. 이번에 드라마 작업 마치고 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완성할 예정이다.

이렇게 굿은 내게 이렇게 많은 귀중한 재산을 남겨주었다.


아, 그런데, 굿이 이렇게 여기서 끝나면 재미없지.

신이 주관하는 이 땅의 오케스트라인데, 이것을 그냥 1막으로 단 번에 끝내겠나.

그래서, 그 뒤로는 오래 오래 행복했대요... 이따위는 있을 수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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