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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27. 2024

굿인가. 쑈인가.

2탄.

아, 그런데, 굿이 이렇게 여기서 끝나면 재미없지.

신이 주관하는 이 땅의 오케스트라인데, 이것을 그냥 1막으로 단 번에 끝내겠나.

그래서, 그 뒤로는 오래 오래 행복했대요... 이따위는 있을 수 없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에!


https://brunch.co.kr/@chocake0704/232

이 글을 읽어보시고 오시면, 이번 화의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하실 수 있다기 보다는 그냥 재밌는 글을 한 편 읽고 지나가려다 두 편 읽고 지나가시게 됩니다. ^^



굿을 마친 뒤, 사실 내가 기대하는 일, 어떤 일도 벌어지지는 않았다.

보험 영업이 잘 되기는 커녕 친구의 실수 하나로 징계까지 먹게 되고 그 기간 3개월 동안 급여가 나오지 않아서 다른 길을 알아봐야 했다. 지금이야 한 10년도 더 넘은 이야기인지라 자세하게 이야기해봤자 뭐하냐 싶어서 대충 한 줄로 여몄지만, 사실 징계도 1차, 2차로 따닥! 연속으로 먹고, 진짜 오지게 일 안 풀리던 시절이었다. (내가 영업을 못하면 못했지 사기를 칠 사람은 아닌데, 일이 안 풀리려면 이렇게 가는 곳마다 타이밍 맞춰서 야무지게 옹침매진다)

바닥이 있으면 지하가 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았다. 돈, 그놈의 돈만 몇 백만 원 더 있어도 그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이때가 2011년 겨울 무렵인데, 아는 언니는 단돈 삼백 만 원이 없어서 생을 포기했다. 아마 십만 원, 이십만 원씩 꾸고 갚고 하다가 나중에는 공이 하나 더 붙어서 백만 원, 그러다가 삼백만 원으로 벼랑 끝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쯤 되니 이제 돈을 꿀 곳도 없고 도움을 청할 면목도 없었을 테고.

그때 장례식장에 가서 조의금 얼마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난다. 나도 이 언니와 형편이 다를 바 없었기에 사실 봉투 안에 지폐를 집어넣는 행위조차 부질없었다. 지금 살아서 걸어다니고 있는 내가 먹고 살 돈이 없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쓸쓸하고 미안한 장례식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데, 백만 원 월급을 받고 어떤 작은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사장하고 나 둘이 일하는 구멍가게였다. 사장의 누님이 어떤 천주교 계통 사립 초등학교 교장 수녀님이셔서 그쪽 학교 졸업사진 만드는 일로 일 년 벌어 먹고 사는 것 같았다.

사장은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한량이었는데,  예를 들어 점심으로 같이 짜장면을 먹다가 고춧가루 팍팍 뿌리면서 "아아~ 짜장면엔 소준데..." 이 소리 나오면 그날 영업 접겠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아침마다 출근 시간 잘 지키고, 넙죽넙죽 주는대로 술 잘 먹는 나를 귀여워해주었다.  


서너 달 버는 돈 없이 지냈던 여파로 쌓인 빚을 잔뜩 뒤로 하고 들어간 회사. 비전도 없고, 당장 한 달 뒤 미래도 없어보였지만 내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는 늘 같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

내가 그 지경이 되기 한 5-6년 전, 근무하던 회사의 대규모 행사를 준비하면서 내가 선곡했던 곡이다.

출근할 때마다 이곡에 맞춰 걸었다. 나중에 내가 잘 되면(그러나, 뭘로 잘 될 건지는 계획도, 아이디어도 전무. 하루하루 버티기만 해도 곡소리가 나오던 때였으니...) 이곡을 들으며 승전보를 알리리라 결심했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아자! 화이팅!이 아니라 그저 끝이 어딘지 모를 터널을 발을 질질 끌어 걸으면서 오지도,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화양연화, 호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비루한 심정에 가깝달까.

그래도 이 곡이라도 안 들으면 인간, 비참해서 못살겠는 걸 어떡하나.


https://youtu.be/TulbyShGmeI?si=6kiPO9L-Ky5qnPue


나를 귀여워해주던 그 대머리에 수염은 빽빽하게 난 사장님은 누님이 교장 수녀님이시되 또 무당집 단골이었다. 쌍문동에 아주 아주 영험한 곳이 있으니 나보고 함께 가자고 했다.

굉장히 추운 겨울날이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었는데 온통 길이 꽁꽁 얼어버렸다. 의례껏 그랬듯 사무실을 좀 일찍 걸어잠그고 나갔다. 사무실이 충무로 쪽에 있었으니 4호선을 타고 갔던 것 같다. 그리고 쌍문역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내 기억에 르노 삼성 서비스 센터가 아파트 바로 옆에 있었다.

어느새 날은 벌써 컴컴해지고...


"아이고, 안녕하세요?"

사장님은 이미 단골인 티가 팍 났다.

무당 선생님은 머리가 긴,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퉁퉁한 아주머니셨다. 나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안녕? 하고 반갑게 흔드는 게 아니라 나가라는 손짓이었다.

"아유, 그러지 말고 선생님, 좀 이 친구 많이 힘드니까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나는 왜 나를 나가라고 하는지 영문을 몰라서 어벙벙하게 서 있었다. 사장님이 나보고 무릎꿇고 고개를 조아리란다. 예전에 굿할 때처럼 왕파리 같이 일단 앉아서 두손을 비볐다.

"아, 안 됩니다."

보살님(=무당님)은 내 점사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사장님은 계속 제발, 제발... 어렵사리 왔으니 한 번만 제발...을 외쳤다. 같이 일할 때는 좀 멍청이 같았는데, 이때만은 고마웠다.

결국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고르니...

이 무당님은 보니까 귀에 리시버를 꽂듯 어딘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 신을 모신다고 했다. 오케이.

그런데, 지금 나를 받을까 말까, 이마저도 지금 신하고 의논하는 것 같았다.

"지난 11월, 뭐 했습니꺼?"

.......................

"굿 했는데요."


이런 대답을 하는 내가 한심할 정도였다.

그걸 어떻게 이분이 알지?

신들 사이에서도 라인이 있는데 그쪽하고 굿을 하고 온지라 또 위에서도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했다.

"원래 이라믄 안 받습니더... "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울 거면 안 받는 것이 원칙이란다.

한참을 할머니신과 이야기하더니 15일 뒤에 오라고 했다. 

플라스틱 바가지, 빗, 이쑤시개, 손거울.... 또 뭐가 있었나... 사가지고 오란다. 별로 비싸지도 않은 물건들이다. 신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물건이었다. 아, 50원 짜리 동전! 지금은 찾기도 어렵다.

그 보름을 참기도 참 힘들었다.

그때는 하루 하루 살기 어려워서...



약속한 보름 뒤, 동네 홈플러스에서 할머니가 좋아하신다는 여러 개 선물을 들고 다시 쌍문동으로 갔다.

갔더니 중학생인듯한 아들이 있었는데,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 뭘 먹을까. 그런데도 이 분은 할머니랑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것 같았다. 아니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도 신할머니랑 노닥거린단 말인가.

여하튼, 그 아들은 실랑이 끝에 짬뽕으로...

나는 옆에 앉아 있다가 신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앞에 신할머니 페이버릿을 주욱 펼쳐 놓았다.

이분은 나에게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이걸 하라고 했다. 진짜 바보 같지만, 했다. 몇 바퀴를 시키는대로 돌았다.


"할매가 니 굶기진 않는단다, 가자."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코끼리 코 하다가 털썩 쓰러져 울었다.

정말 굶지 않는 거냐고. 너무 너무 너무 불안했다.


"니 그동안 고생 많았는데 조금 더 해야 한다.

미안한데 10년은 더 고생해야 해서 미안해서 얘기를 못하겠다.

잘 버틸 수 있을 거고, 굶기진 않을 테니 잘 가자."

 

보살님이 내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이거였다.

워낙 경상도 사투리 엄청 센 분인데, 갑자기 옛날 서울 말, 혹은 북한 말을 쓰시는 거다.

정말 접신하신 걸까. 너무 무서웠는데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니... 다시는 이런 점사 보지 마라. 우리집도 오지 마라."



살 방법을 몰라서 죽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사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바보 같지만, 이런 구원의 한 마디가 없었다.


굶기진 않을 거다. 돌아가라. 잘 가자.


우리나라 사람들, 되게 우스운 것이, 전 세계 사람들 다 우스운 것이, 이런 마법사들 무시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 '굶기지는 않는단다.'라는 그분 말씀 한 마디로 지금까지 산 것 맞다.

신기하게도 저 뒤로 가을녘.... 사과 한 상자 사서 그 아파트 앞에 몰래 놓고 왔다.


코끼리 코를 하고 빙글빙글 돌면서 그때도 너무 힘든 지경이라 들은 그 말이 그 말이 정말 맞을까 싶었다.

굶기진 않을 거다. 돌아가라. 잘 가자.


이미 그때보다 족히  15년은 지난 지금.

아직도 어려운 일, 왜 없겠냐만 그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사는 것이 훨씬 낫다.

그리고, 그때 스스로 죽었으면 좀 아까웠을 것 같다.

지금 삶이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다.

정말 지금 사는 일이 불행해서 미치겠고, 당장 죽겠는 분들 때문에 죄송해서...


정말 지금 사는 일이 불행해서 미치겠고, 당장 죽겠는 분들...

느낄 수는 없겠지만 정말 지금보다 나을 때가 온다.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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