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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Feb 26. 2024

에세이 <추억의 생애>

좋은 책 한 권 소개합니다. 

'책 읽기를 신중하게 하자' 하고 결심한 후, 예전처럼 '덩어리' 독서가 아닌 한 땀, 한 땀 '문장'을 꿰어서 독서를 애써 실천하고 있다.

어려운 책도 한 문장, 한 문장 저미듯이, 이해 안 가도 중간에 때려치우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페북에서 만난 박기원 님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크리스마스 무렵. 

그분 글의 특징 1. 가끔씩 sns에서 만나는 좋은 글은  메모해두기도 하는데, 기원님의 글은 가끔씩 내 노트북 메모장에 등장하는 단골손님이었다. 

그분 글의 특징 2. 

오며 가며 바쁠 때는 안 읽고 넘기는 글이다. 하루 일과 마치고 차분히 책상에 앉아서 읽는다. 나한테는 그래야 맛이 났다. 

이런 Adagio ma non troppo 아다지오 마 논 트로포 (느리지만 너무 과하지 않게)의 글이 책 한 권으로 묶여 나왔다고 해서 바로 구입했다. 

바로 신나게 책 소개로 들어간다. 




1. 

문장 여기저기에서 작가만의 세심하고 유쾌한 표현들이 이불 하나 덮고 숨어있다.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하더라도'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그와 하루 이틀 상관으로 태어나 동시대를 건너왔던 나는 바로 '동물원'의 노래를 떠올렸다. 



소식조차 알 수 없는 타인이 됐지. 우우우우~ 그리움으로 잊히지 않던 모습~ 

기원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 사실은 그거 아닌데요?" 해도 할 수 없다, 마. 



2. 

'저녁식사 후 남자는 아직 비울 때도 아닌 음식쓰레기통을 챙겨 나간다. 처리장 한 귀퉁이에서 서성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사내 두엇. 엉거주춤 제각각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남자 역시 그 틈에 섞여 말없이 한 대 피워 올릴 것이다.'



기원 님이 LP판 당근 거래 한 번 하고,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 올린 장면들이다.  이 문장에서 어느덧 중년이 된 이 '남자'는 '야마꼬'라는 별명을 지닌 우리 이쁜 여동생에게 <페르귄트 모음곡> 1989년 판을 선물 받았던 이다.  

이 장면은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야마꼬'라는 이름을 보고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야마꼬가 누구야?"라고 물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부터 시작한다. 

중년의 부부답게 질문자는 답변자에게 어떤 답이 돌아오든 관심이 없다. 남편은 '그냥 알았던 후배'라고 둘러댄다. 조금은 가슴이 덜컹, 그러나 아내는 전혀. 물건 정리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나는 이 부분에 줄을 죽죽 그으면서 막 웃었다. 

이 냥반, 영화, 시나리오 많이 본 티 난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이 장면은 꼭 기억해 두었다가 어딘가에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혹시 표절인가!?)


3.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비틀스의 팬이란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내가 비틀스의 팬이 아니었다. 이미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에 해체된 딱정벌레 4마리 밴드에 전 지구인들은 어인 일로 열광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비틀스 뭐가 좋은 지 모르겠어요." 하면 무식쟁이 취급받을까 봐 소신 발언(?)도 못하고 있던 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가를 낳을 때면, 거의 짐승 소리 낼 때쯤 즉 출산 임박할 타임에 비틀스의 'Here comes the Sun'을 틀어달라고 미리 부탁을 하곤 했다. 관종력 세계 1등의 위엄. 물론 영화처럼 제때에 트는 남편은 한 명 도 없었지만... 


https://youtu.be/GKdl-GCsNJ0?si=OVDf22Hcx9-7ZQ0f


아,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시험에 이것 되게 많이 나왔었다. 

같은 발음을 가진 단어를 올바르게 짝 지은 것은? 

sun(태양) - son(아들) 


당연히 이 책에도 비틀스, '그들의 과감한 시도와 실수, 장난기와 치열함, 결핍과 여백 등 노동의 빛나는 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천재적인 멜로디 기획자, 사랑꾼 폴은 린다라는 사진가와 연애를 하고 있었고, 그녀를 위한 노래를 친구들과 노래했다. 그렇다. 

'자신의 러브송 하나에 '공적 자산'인 밴드의 역량을 쏟아부었다'


오후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8시간 동안 67번의 테이크가 나왔다고 한다. 각고의 노력과 멤버들의 짜증(?)이 담긴 67개의 테이크 중 하나를 선택한 결과, 당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I will'을 듣고 있다. 


'터질 듯한 그리움을 담았으나 너무도 담백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1분 46초짜리의 명곡 <I will>'


https://youtu.be/SZBsVbKROV0?si=rzoiI1pB6znXLpgr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모두 이 제목, 본 적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고막에 대고 멜로디를 흥얼거려 드리면 아아~ 그 노래! 하실 것이다. 

그러나, 비틀스에서 그냥 뚝 면발 끊듯이 이야기를 끊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비틀스 단상일 테니 좋았겠지만, 책의 풍미를 더욱 깊게 하는 것은 이런 부분이다.


'그렇더라도 저 혼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생의 테이크를 시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자기 객관화의 부족일 수도 있다. 혹은 무쓸모의 자기만족이나 자기 암시에 불과할 수 있다. 

...(중략)

이것도 용기라면 용기다. 그 와중에 꿈을 되풀이하여 꾸는 게 언젠가는 완성된 그 무엇이 될지 확신할 수는 없다. 새로운 생의 약속을 잡기에 애매한 내 생의 '일요일 오후 4시'도 이미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일요일 오후 4시. 

이 표현을 쓸 수 있는 감성맨... 

그리고, 어떤 글감을 올려놓아도 싱싱하게 친 횟감처럼 인생을 저며낼 수 있는 (칼잡이가 아닌) 드문 글잡이...


그렇다고 이 책이 이렇게 달달한 감성만으로 폭 적셔진 딸기 케이크 같다고 생각하시면 절대 안 된다. 

어느 쪽에는 그의 눈으로 목도한 1980년이 담겨있고, 또 다른 쪽에는 1993년의 뜨거움이 있으며, 어떤 쪽에서는 해태 타이거즈가 '딱' 소리를 내며 담장 밖으로 공을 걷어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보통 사람 이상의 비상한 기억력으로 김원준으로 시작된, 이미 40대를 지나 지금은 머리 까진 50대를 달리고 있는, 처음으로 '세대'라는 명칭을 선사받았던 우리 X세대를 촘촘히(너무 촘촘히... 인 것이 도대체, 날짜까지 다 적어놓고 있단 말이다!) 톺아보고 있다. 




영화, 드라마를 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가상의 생에 대한 '몰입감'이다.

짧지 않은 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볼 때도 내가 마치 호텔 투숙객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몰입이 현생의 고단한 삶마저 행복하게 만들 정도로...

<소년시대>를 볼 때에도 저 겁쟁이 븅태를 응원하면서 '제발 아산백호 아닌 거 걸리지나 말어~' 를 마음속으로 되풀이해 외치며 아등바등 댔다. 내 일처럼...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에세이집 <추억의 생애>를 읽으며 같은 마음이었다. 이 책이 안 끝났으면 좋겠는 것이다. 물론 이 예쁜 노란 책을 덮고 페이스북으로 들어가면, 그가 비활을 하지 않는 한 정성 들여 쓴 기원님의 글을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내 마음의 문제'라고 하는 한 꼭지의 글 제목처럼 몇 살이 되었든, 어떤 연령대의 사람이든 읽어보면 한 편의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듯한 황홀감을 맛보실 것이다. 

게다가 좀 두꺼워? 그 황홀감은 492페이지, 끝까지 오래 음미하실 수 있다. 


이 글 첫머리에서 이야기했던, 한 땀 한 땀 독서, 맛있게 잘 끝냈다. 

가끔 책꽂이에서 찾아 또 들춰볼 것 같다. 따라 쓰고 싶은 단어나, 문장 표현이 있으면 또 메모해 두고... 

요즘 글을 잘 쓰고 싶어서 필사하시는 분들 많은데, 만약 필사를 한다면 이 책을 권해드린다. 잘 빚어진 글 한 편, 한 편 꾹꾹 눌러 적는 맛 또한 일품일 것이라 확신한다.  


이메일 '엠파스'... 저자의 성정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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