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많은 사람들 앞에서나, 카메라 앞에서 온전히 나로 서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간의 나의 노력이나 인물로서 몰입하려 했던 시간들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순간. 인물의 살아있는 느낌은 증발해 버리고 배우로서의 쇼잉(showing)만 남게 된다. 노력하고. 반복하고. 찾고. 괴로워하고. 느끼되 모든 설정과 연습들을 다 버리고 그냥 존재하는 것. 그냥 사는 것. 그게 연기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 같다. 내가 인물인지, 인물이 나인지 알 수 없는 그 경계에 서는 것. 그 짜릿한 마약을 경험하게 되면 그만 둘래도 끊을 수 없는 게 연기인 듯.
주연은 말할 것도 없고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의미 없어보이는 듯한 단역도 그리고 오디션도, 그 1-2분의 짧은 시간에 인생이 보여야 한다. 그 삶을 얼마나 촘촘하게 쌓았느냐로 성패가 나뉜다. 지하철의 많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생처럼. 다큐멘터리의 인물들의 30초가 30년을 담은 것과 같이. 좋은 배우를 찾는 연출들은 찰나의 순간을 진정으로 사는 배우들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그러니 염려 말고 그냥 살아라. 그날들을.
스레드에서 한 배우님이 남긴 글이다.
백선우 배우.
배우들이 이렇게 일 분 일 초 안에 자기의 삶을, 혼을 밀도 있게 집어넣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데,
그 배우들의 혼을 담을 대본을 함부로 쓸 순 없다.
내가 그랬듯이, '나는 대사를 잘 써', '지문으로 그냥 예술 쌉 가능'...
대본은 이런 더러운 자만심이 들어가는 순간 쭉정이가 되어 태풍에 날아간다. 대본은 글로 하는 예술이 아니다.
가장 담백하고, 한없이 친절하며, 뒤로 꽁꽁 숨어야 한다. 그래야 맑고 단단한 배우들을 프리즘 삼아 색색으로 저 멀리 퍼져나갈 빛줄기를 빚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명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