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섬 Apr 01. 2024

[나의 망생일지] 불안감이 나를 먹어버릴 때

그 불행마저도 쓴다 

2022년 이후, 책을 출간하지 못했다. 드라마 쓰느라고 시간이 없었다, 발목이 묶였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부끄럽다. 그렇다고 딱히 게을렀다고 치부할 수도 없다. 가끔은 남들은 다들 앞으로, 앞으로 죽죽 치고 나가는데 나만 종종대며 제자리 걸음이라는 생각이 때가 있다. 정말 얼마나 불안한 지 모른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게다가 이제 내일부터 매일 매일 아이 데리고 운동하러 다녀야 한다는 압박감에 멘탈이 지구 내핵까지 가라앉았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난 뒤, 앉아서 정신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오늘은 유독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sns에서는 그렇게 뻑쩍지근하고 성대한 북콘서트 소식들만 들리는지, 원... 드라마는 방향은 제대로 잡힌 같은데, 진전은 더디고... 


목적을 예정대로 제 시간에 달성하는 힘, 그것이 운이라고 했다. 지금은 내 운의 기운은 힘차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들야들한 아기 봄쑥 같이 보숭보숭, 부들부들... 얼른 힘차게 자라라. 운빨아! 


나의 하루 일과는 대략, 7시~7시 30분 정도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집안 정리를 시작한다. 그러면 아이가 일어난다. 8시 20분 정도 학교에 보내고 나면 나머지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을 잽싸게 마친다. 아무리 그래도 책상에 제대로 앉는 시간은 오전 9시는 훨씬 넘길 날이 많다. 

그렇다고 노트북 앞에서 내내 긴 시간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간에 세탁소도 가야 하지, 은행 업무도 봐야 하지, 밀린 공과금도 내야 하지, 물 떨어지면 물 사야지, 휴지 떨어지면 휴지 사야지, 집 어딘가 고장이 났다면 사람 불러서 기다려야지...  내가 하루 세 끼 꼬박 아이들 밥 해먹이는 그런 성실한 엄마는 못 되지만, 그래도 입에 풀칠할 것들은 준비는 해놓아야 하지 않나. 나도 어려서 엄마에게 '탄수화물을 달라!' 하면서 익살스럽게 뒹굴었던 웃긴 기억이 난다. 이런 것들이 글로 쓰면 그냥 후딱 해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싶지만, 막상 시작하면 또 반나절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예전에 어떤 분께서 하루에 딱 네 시간만 글을 써보라고 하셨었다. 자료수집까지 합친 시간이 네 시간이라고 했다. 나는 "에이~ 그렇게 조금 일해서 어떻게 책을 쓰고 대본을 써요?"라고 받아쳤는데, 웬걸. 하루에 네 시간 집중하기도 지금 내 삶의 컨디션에서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지만, 어쩌겠나. 기를 쓰고 시간을 만들고 비우고... 


모든 것이 다 물먹은 솜처럼 축 쳐져 가라앉아 있는데,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랑 연결이 되어서 일단 기획서를 이번 주초에 보자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왔던 정리해서 달라고 하신다.


"수요일까지 가능할까요?"

기획안을 수요일까지 쓰라고? 가능하냐고?

"당연하죠! 아니, 가능해야죠!"


갑자기 국면 전환이 오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도전! 




오늘 오전, 평탄화 매트 주문하기 전 그래도 3열 의자 떼지 말아볼까 하고 마지막으로 의자 뒤로 최대한 젖히고, 숙이고 난리를 치다가 믿고 있던 2열 의자한테 내 광대뼈를 냅다 처맞았다. 이렇게 광속으로 솟구쳐 오를 줄은 몰랐다. 지금 나의 왼쪽 뺨은 시퍼렇게 멍들어서 누가 보면 남편한테 맞은 줄 알겠다. ㅠㅠ 


내 인생에서 최악의 남편은 3번이었는데, 이자는 늘 신경질을 달고 살았고, 싸울 때면 꼭 나를 때렸다. 게다가 고추 달린 새끼가 싸울 줄도 잘 몰라서 꼭 보이는 데를 때렸다. 눈, 얼굴, 팔, 다리... 마침 그때 나는 회사 교육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교육부가 뭐 하는 데냐. 2-300명 앉혀 놓고 강의하는 데다. 그 시절 내가 키웠던 것은 '강의력'과 '거짓말' 이 두가지다. 

강의력은 내가 말할 것은 못 되고, 거짓말은... 

눈이 시퍼래졌거나, 충혈되어 있거나, 팔이 멍들고, 고개가 꺾여 있을 때면 그에 알맞는 거짓말을 진짜 스토리텔링 제대로 해가며 강의 들으려 앞에 앉아있는 분들께 유쾌하게도 늘어놓았다. 


예를 들면...

새벽에 아기 우유 먹이려고 나왔는데 글쎄 싱크대 찬장 문이 열려 있지 뭐예요. 그걸 못 보고 그냥 얼굴로 쿵 박았네요. 

왜, 아기 키울 때 현관문 밖으로 못 나가게 하려고 설치한 작은 문 있잖아요. 거기에서 넘어졌어요. 

제가 원래 멍이 좀 잘 들어요, 엄마 닮아서. 

렌즈를 중3때부터 꼈는데, 이제는 너무 오래 껴서 그런가요? 렌즈를 끼면 자꾸 이렇게 눈병이 나네요. 

그때 그때 이렇게 신박한 거짓말로 무마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웃기고, 애처롭다. 그 수많은 사람들, 특히 결혼한 사람들은 강의실에 앉아서 속으로 '저 강사 여자 지난 달에도 남편한테 처맞더니 오늘 또 맞았네.' 하면서 다 알았을 텐데... 

내가 갑자기 왜 이야기 하냐면, 지금 내 얼굴 보고 사람들 다 남편한테 맞았다고 생각할까 봐 그러는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맞은 거 아니냐고 의심할 것이 걱정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멍이 시퍼렇게 들었어도 조금은 행복했다. 



나의 과거가 놀림감이나 우스개로 소비되어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심각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볼 필요도 없다. 지금의 나는 과거에 단 하나에라도 얽매여있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어처구니 없던 과거의 에피소드 한 자락은 이리도 세밀하게 남아서 대본에 섞인다. 이런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고 싶었다. 


****에게 나의 진심이 가닿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요즘 읽고 있던 <50에 읽는 주역>에서 기억에 남는 문단 읽으며 내 길을 또 걷겠다. 하늘도 음으로 양으로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하늘의 천지창조라는 부역에서 신성한 임무를 부려받고 이에 합당한 자리에 놓여있다. 나는 하늘이 기다려온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나 이외에 아무도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지구상의 80억 인구 중에 이 길을 나 대신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길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놓인 것이다. 태초 이래로 오로지 지금의 나를 위해 예비된 길인 것이다. 하늘은 빅뱅을 일으킨 이래 180억 년 동안 나를 예비하고 기다려왔다. 지금의 이 길을 걸어달라고. 그러므로 마음 먹고 걸으면 나는 이 길을 아주 잘 걸을 수 있다. 하늘의 도움 역시 음으로 양으로 따를 것이다. 지금 이 길이 나의 운명이라면 내가 걷겠다, 내가 감당하겠다 마음먹고 기꺼운 마음으로 걷는다면 하늘이 지켜보며 기뻐할 것이다

- <50에 읽는 주역> 중






이전 22화 쨍 하고 해 뜰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