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전백승으로 알고 있는 당신에게
매주 한 번씩 제작사 대표님과 함께 드라마 회의를 한다. 한 달 정도 됐다. 본격적으로 대본 들어가기 전 캐릭터, 에피소드, 구성을 디자인하는 회의다. 드라마 기획 한번 하면서 벌써 수년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쓰면 이제는 지문만 닳을 테고.
"내가 일제시대 예술가가 된 느낌이야."
갑자기 대표님이 그러신다. 일제시대 예술가? 말이 재미있어서 피식 웃었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 그저 영화만 고집해 왔고, 어딘가에 꽂히면 앞뒤좌우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냥 그것으로만 돌진해 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으신다. 뭔가 생각이 굉장히 많은 것 같은 느낌. 느낌이 아니라, 생각이 많았다, 대표님도. 나와 같이...
요즘 드라마 시장, '가성비 게임판'이다. 돈이 다들 없다는 거다. 요즘 같은 판국에 12화 이상 넘어가는 것은 모두들 부담스럽다고 한단다. 왜? 판돈이 없으니까. 넷플릭스도 16화 드라마 한 편보다는 8화 두 개 올리는 것을 선호한다. 길게 끄는 것 한 작품보다 짧은 것 두 작품이 구색 맞추기 좋다. 그래야 매주 이번 주 신작! 이러면서 광고도 때릴 수 있고 말이다. 무조건 요즘은 짧게, 짧게... 전체 제작비가 부담이 되면 일단 안 들여다보는 것은 자명하다.
"작가님, 지피지기면 그다음이 뭔지 알아요?"
나는 너무나 당당하게 답했다.
"백전백승이요."
왜 너무나 당연한 답을 물어보지? 그러나, 이렇게 답이 뻔한 것을 물어볼 때는 허를 찌를 심산인 것이다.
"백전백승하면 좋을 것 같아? 어때요?"
오십 년 인생, 불안이 평소 지병이었던 나는 '불안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대표님은 요즘 '오십에 읽는 손자병법'을 읽고 계신단다. 요즘 '오십에 읽는' 시리즈가 유행인가 보다. 나 또한 '오십에 읽는 주역'과 '오십에 읽는 사기'를 책꽂이에서 빼어든 터라 더더욱. 오십이라는 내 나이. 맹자께서는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게 되는 나이라고 하셨으나, 내가 어떤 명을 받고 태어났는지 먹고 사느라 바빠 알 길도 없고, 치열했던 3-40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조홀라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사는 오십들이 가슴속 심장박동이라도 늦춰보고자 고전을 찾아대는 건 아닐까 싶다.
"백전백승하다가 백일 전에서 패하면 어떨까?"
본디 손자병법에서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하였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승패가 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위태로움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고 싸움하러 덤비면 백전필패, 백 번을 싸우면 백 번 다 진다. 백전불태라... 백승을 하고 난 다음 아파서 죽거나 아무리 사업을 크게 키웠어도 한 순간의 위태로움에 와르르 무너져 흔적도 없어진다면 그게 무슨 의미겠냐는 것이다. 어떠한 요소가 내 상황에서 위태로운지 세심히 살피는 것, 이것이 사업을 하는 대표님이 그동안 간과를 했던 것 같다고 하신다. 그냥 내가 좋으면 고! 였다고. 그리고 시간 계속 끄는 것, 그걸 못 고쳤다고 마른세수를 하시는데... 기획안이 칠전 팔기를 넘어 그동안 열 번 넘게 바뀌고 있는 걸 함께 하고 있는 나 또 얼굴이 함께 붉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떤 기가 막힌(?) 젊은 제작자 한 명은 한 프로젝트 들어가면 작품 기획, 대본 완성까지는 아니더라도 4-5화까지 쓰고, 감독 붙이고 캐스팅까지 6개월을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이거 반 년동안 세팅 안 되면 그건 버리는 걸로 한단다. 왜냐하면 드라마가 소재도 단기 트렌드에 민감할 뿐만 아니라 편집, 구성도 반년 단위로 유행이 바뀌는 걸 그 사람은 파악했기 때문. 우리도 중간에 기획 엎은 큰 이유가 비슷한 소재의 드라마가 계속해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속도전이다.
그럼 우리를 분석해 보자. 지기.
소재. 이혼. 괜찮아.
접근 방식. (이건 사실 치트키라 밝힐 수는 없다) 좋아.
흠... 다 패스하고 작가를 이야기해본다.
작가. 신인이야. 데뷔도 아직 안 했어. 장점? 이혼이라는 소재를 쓰는데 최적이야. 디테일은 아무도 못 따라와. 글은 좀 써(이건 대표님이 분석한 것이라 부끄럽지만 여기다 씁니다... 영 못 쓰는 사람은 또 아니라고 나도 나를 알고 있는지라... 부끄럽습니다만).
5월 둘째 주까지 모든 기획 세팅 마치기로 했다. 뭔가 잔뜩 재미난 숙제를 안고 돌아온 느낌이다.
만두책을 쓰느라고 전국을 돌아다닌 1-2년이 있었다. 거의 매 주말이면 살고 있는 서울을 벗어나 지방에 내려갔었다. 그렇게 가면 빠지지 않고 절과 성당에 들렀다. 뿐이냐. 사당에다가 막걸리도 뿌렸다. 강원도 고성에 있는 한 사당은 담 넘어 들어가서 바지 무릎 찢어져가며 뿌리기도 했다. 드라마가 너무너무 쓰고 싶어서 정말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영험한 기운에 나의 재능, 소망, 인생마저도 맡겼다. 제발 단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정말 잘 해내겠다고. 드라마, 너무 오래 끌다 보니 내가 요즘 이 간절함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쓰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던 때는 언제고...
이 뒷 모습을 보고 딸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엄마, 뭐 있어?"
있지. 엄마, 너무너무 드라마 쓰고 싶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가 유퀴즈에 나온 배우 박지환 편을 봤다.
그도 나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18년의 무명동안... 커다란 나무에게도, 바위에게도.... 아 여기 몇 년째 계셨어요? 저 몇 살인데요, 하아~ 그 기운좀 저 한테 0.01%만이라도 나누어 주세요.
그리고 그 배우에게 어느 순간 오디션에 계속 붙는 '때', 바로 이 '때'가 온다. 그러면서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에도 등장한다.
와 이런 대본이 다 있나?
너무 신기해요, 거의 문학이에요, 문학.
어떤 장면은 에세이처럼 쓰여 있고,
어떤 장면은 시처럼 사람을 설득하고 있고,
어떤 사람은 잔잔한 여백, 글의 여백으로 소리에 집중, 바다나 하늘을 보게 하는...
그리고 대답을 하게 하고.
노희경 작가의 대본을 읽고, 배우가 한 이야기다. 이런 찬사가 어디 있을까.
#23
영옥, 정준 눈을 보며, 음료를 마시며, 이 아일 사랑하겠구나, 이 아이가 다치겠구나 싶은,
이런 지문... 이런 지문을 보면서 어떤 배우가 가슴이 뛰지 않을까. 정말 노희경 작가 같은 세상에 울림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 돈? 돈도 벌고 싶은데... 그 지경은 이미 내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 알고. 글은 썩 못 쓰지는 않는 것도 알고. 너무 오래 간절했더니 간절함도 번아웃이 왔었다.
시작이다. 다시...
아, 정말 지긋지긋 미치겠지만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