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주연일수는 없는 조연의 만두들
태어나면서부터 한 번도 내 친구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없다. 늘 머리 하나는 작은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키가 크다 보니, 다들 좋겠다고 부러워하지만 어려서는 참 속상한 일이 많았다. 우선 동네에서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에게 깨알 귀여움을 받기가 어려웠다. 애교는 커녕 뚝뚝했던 성정 탓이기도 했지만, 일단 내 덩어리가 깨알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성당에서 학예회, 발표회하면서 연극을 하면 욕심이 있어 꼭 참여했었는데, 늘 주연을 놓쳤다. 아니, 캐스팅 권한을 지니신 선생님은 '너가 똑똑하게 잘 알아 들으면서 연극 잘 하는데, 너무 크다'면서 주연을 다른 조그맣고 예쁜 애들에게 넘겨버리셨다. 열 살, 열한 살 때 그게 얼마나 속이 상하던지......
오히려 나는 뒤로 숨어 있으려 하거나 나서는 것 싫어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관종'에 가까운 편인데, 내일 모레 오십 다 된 오늘날까지 주연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커다란 승전보를 울린 적이 없다. ('한 번도 없다'고 쓰려다가 앞으로 한 번은 있겠지 싶어 고쳐 쓴다) 게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백 프로 흡족하게 내 손에 쥐어 진 적도 없다. '뜻 밖에, 기대 이상으로 큰 결과가 이뤄졌어요.' 이런 것 없다. 늘 7할 혹은 8할 선에서 멈춰서는 바람에 아쉬운 입맛 다시게 한다. 내 욕심이 주제를 넘어 천정 끝까지 올라붙어서 그런 것 같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는 요즈음이다.
이렇게 서두를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내 컴퓨터 폴더에만 잠자고 있는 우리의 '아쉬운 만두'들에게 패자부활전 기회를 주고 싶어서이다. 물론 그 마이너 만두 선수들의 선정 기준은 오로지 나였고, 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폴더에 오랜 시간 잠자고 있었다. '만두 엄마' 네 입맛이 뭔데? 라면서 반항할 만두...
그래서 오늘은 주연이기만 할 수 없던 조연으로 빛이 난 만두를 몇 군데 모아서 기억해볼까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바, 절대 만두를 평가하지 말자. "아 진짜 이런 식으로 장사하시면 안 돼유~!" 백종원의 호통이 쩌렁쩌렁 울릴만큼 비양심적인 곳이 아니라면, 만드는 사람들의 정성을 평가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모든 요식업의 선수들은 필드에서 나 말고라도, 다른 손님들에게 이미 수없이 평가를 받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곳은 우리집에서 가깝기도 할 뿐더러 공간도 넉넉하고 깔끔해서 그래도 자주 가는 집이다. 특히 평양냉면을 하는 집이 이 동네에 별로 없는지라, 평양냉면이 먹고 싶을 때 을지로나 강남까지 가느니 이 집에 간다. 이집이 문을 열고 내가 드나든지도 거의 5년이 넘어가는데, 정말 한결같은 것은 찬으로 나오는 열무의 맛. 물론 평양냉면 위에도 올라가는데, 사시사철 단 한번도 그 열무가 익어서 나온 적이 없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안 익혀주는 걸까 불만스러웠지만, 또 계속 먹다보니 새파란 열무 특유의 단맛도 애써 찾게 되는... 그런 마력이 있는 곳이다.
면옥의 간판을 내건 이 집의 시그니쳐는 어복쟁반이라고 부르는 '만두전골'이다. 보다시피 전골에 뭔가가 잔뜩 푸짐하게 올라가 있다. 한우 사태, 양지살, 육전, 쑥갓, 커다란 왕만두 2개, 버섯, 계란 등등... 몸보신하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만두도 이 집에서 일하시는 어머님들이 직접 빚는다. 이 메뉴는 장정 한 세 사람이 붙어야 적당한 양이다.
그런데, 만두가 늘 아쉽다. 만두가 자꾸 제 역할을 잃고 사라져버리니 말이다. 이 날도 양조절 실패로 술만 잔뜩 마시고, 이 훌륭한 음식들을 거의 남기고 왔다. 만두는 손도 대지도 않았던 것 같다. 술꾼들은 뭐니뭐니해도 술잔하면서 뜨끈한 국물로 속을 데워서 먼저 술길을 열어 놓는데, 이 만두전골은 과유불급, 안에 뭔가를 잔뜩 넣어서 국물을 자꾸 빨아들인다. 평소에는 꼭 만두 전골이 아니더라도, 평양냉면 옆에 사이드로 만두 두 개 정도 시켜서 함께 먹는데, 찐만두로 진검승부를 걸기에는 조금 아쉬운 심정이다.
그런데, 또 가게 된다. 공간의 마력일까.
사람은 가도 만두는 남는 것.
이 집에서 구석에는 딱 한 테이블 긴 것이 들어가는 아늑한 공간이 있다. 거기에 앉아서 긴밀한 부동산 계약을 해도 되고, 사랑고백을 해도 될만큼 따로 잡힌 공간이다. 그 자리에서 평양 냉면에 만두 시켜서 편하게 소주 마시던 동생이 자꾸 떠오른다. 지금은 사소한 오해인지, 너무나 큰 반목이었던 것인지 안 보고 있지만 말이다. '에이, 누나 섭섭하다. 왜 그러는 건데, 이유나 좀 알자.' 하고 카톡이 왔었을 때 이유라도 알려줄 걸 그랬나. 그러면 또 누나가 사소한 것으로 투정부리는 것이라 생각할까봐 입을 다물어버렸더랬다. 별로 좋은 해결방법은 아닌 것 같지만, 이제는 또 돌이킬 수가 없다.
나이 들면서 더 좋은 사람들만 골라서 만나자는 생각으로 급박해서인지, 점점 포용하고 감싸지 못하고, 쳐내고 잘라내기에 바쁘다. 만두는 모든 것을 감싸는 포용의 음식인데 말이다.
서울 묵동 백악관 나이트 바로 앞, 황해 칼국수에서 파는 만두다.
이 집은 가게 이름만큼 칼국수가 유명하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뜨끈한 어탕국수를 파는데, 그게 또 별미다.
한 번은 어탕국수를 땀 뻘뻘 흘리며 먹다가, 이 집에서 자가제만(?)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굳이 찾아와서 시도해본 만두다. 만두국을 먹어볼까, 아니면 만두 칼국수를 먹어볼까 하다가 에잇! 찐만두로 진검승부를 걸어보자 하고 시켜보았다.
이 집은 워낙 칼국수 전문인 집인지라 들어와 앉는 사람들 모두에게 작은 공기로 보리밥을 준다. 그리고 열무와 배추 김치 두 가지가 나오는데 기가 막히게 시원하다. 특히 열무는 늘 적당히 익어 있어서 주방 총괄 아주머님의 운영 프로세스가 남다름을 눈여겨볼 수 있지. 당연히 테이블 옆에는 참기름 올려져 있어서 비벼 먹게 해주셨다. 보니까 손님들이 와서 칼국수를 먹지 않더라도, 김치를 만원씩 해서 포장해가기도 한다.
만두가 한김 푹 쪄서 나오고, 한 입 먹고 나서 번개맞듯 든 생각이 있다. 갸웃하고 또 한 개를 집어 먹어 보았다. 저 청양고추 잔뜩 썰어넣은 간장에도 찍어 먹어보고, 만두 위에다가 배추김치도 얹어서 먹어보기도 했다. 그래도 느낌이 확 오지 않는다.
어쩌면 이 만두의 제맛은 만두 칼국수나, 만두국으로 시켜야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두 먹다 먹다 이런 생각이 든 것 처음이다. 이 만두는 혼자서는 주연이 되지 않는 만두다. 맛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두 자체로는 뭔가가 허전한, 완성되지 않은 맛이다. 꼭 맛이 평양만두처럼 심심해서만도 아니다. 이 만두는 꼭 합이 잘 맞는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나야 제 역량을 발휘할 것 같다. 그 칼국수, 수제비와 같은 반죽들도 얘를 만나야 제맛이 들 것 임은 물론이다. 다음에는 꼭 만두 칼국수를 시켜서 다시 먹어봐야 이 만두의 진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묘한 동질감이 든 식사였다.
'너도 나같이 아직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 돋보일 수 있는 시기가 아니구나. 어쩌면 계속 그렇게 국 속에 묻혀서 조연이 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러면 어때. 괜찮아. 맛있게, 꾸준히 팔리기만 한다면.'
포천의 이미 소문난 맛집 동이 손만두다.
한 10년 전 부터 경기도 맛집에도 선정이 되는 등, 활약이 대단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포천 쪽 안가본지도 참 오래되기도 해서 겸사겸사 마실을 간 곳이다.
혼밥, 혼술 좋아하는지라 만두집도 어쩌다보니 혼자 가게 된다. 당연히 포천도 혼자 나온 길이었다. 음식점에 들어가니, 가게가 엄청나게 넓다. 일하시는 분들 발에 인라인 스케이트라도 신겨드리고 싶을 만큼... 사람들도 바글바글했다. 코로나 사태가 지금 이렇게까지 심각하기 전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도 나오기 전이었다. 커다란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 안내해주시는 분이 있나 하고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어떤 아주머니가 휘익 나오시더니 이러신다.
- 혼자 오셨어요? 만두국 드실 거죠?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그만. 사람들 들쑥날쑥 그런 성향들 다 가지고 있지만, 공부하려고 책상치우고 준비하다가도 밖에서 엄마가 "공부해라!!!!" 소리를 지르면, '싫어, 나 안해'하고 마음 먹어버리는 청개구리 성향이 아주 강하다. 아무리 혼자 왔기로소니, 내가 만두국을 먹고 싶어 온지 그 분이 어떻게 안단 말이지? 물론 이 곳은 2인이 기본인 만두 전골에 커다란 해물파전, 도토리묵 같은 것을 파는, 가족단위로 많이 찾는 대형식당이라서 익히 손님이 뭘 시킬지는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약이 올랐다. 갑질을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내 돈을 내고 들어와서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된다.
- 아니요. 찐만두 하나하고요, 도토리묵 하나 주세요.
만두가 아주 예쁘게 쪄져서 나왔다. 만두피가 저리 초록색인 것은 피를 반죽할 때 해초를 넣은 까닭이라고 한다. 옆자리를 보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녀를 데리고 나와서 아주아주 맛있게 만두전골을 나눠드신다. 보니까 이 만두가 그대로 전골에도 들어가고, 떡도 넣어서 끓이는 것을 보니 아주 먹음직스럽다. 혼자 왔으니 언감생심이다. 물론, 호기롭게 여기 만두 전골 하나 주세요! 큰소리 떵떵 칠수야 있겠지만, 그 무슨 음식낭비에다가 의미없는 푸드 플렉스란 말인가.
그러한 인연으로, 오늘 이렇게 이 동이손만두집의 만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조연 만두.
찐만두 하나에도 아쉬워서 도토리묵을 시킨 것도 사실 좀 후회가 되던 차였다. 게다가 만두의 맛은 사실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맨 처음 들어와서 만두국으로 나를 단번에 후뚜루 마뚜루 잘못 짚어버린 사건으로 이미 기분이 상해버려서 그랬을 것이다 도토리묵은 사진에 찍힌 것과 같이 훌륭했다. 도토리가 적당히 쑤어져서 몰캉몰캉하구나를 입에서 느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가게는 너무나 컸고, 손님들도 너무나 많아서 혼자 우뚝 앉아 있는 나를 압도했다.
'다음에는 와서 만두 전골을 먹어봐야지' 굳이 이런 생각은 들지는 않았다. 블로그 후기에도 종업원을 부르고자 한다면 '결코 돌아보지 않는 그대의 뒷모습'을 인내해야 한다는 글귀가 나를 웃겼다.
이 밖에도 가게집의 조연으로 열심히 자기 할일을 해내는 만두들이 있다.
가평의 청하막국수 잣만두.
이렇게 특이한 만두국은 처음 먹어봤다. 가평의 특산물이 잣이란 점에 착안해서 만두를 빚을 때, 잣을 넣으시고, 국물까지 잣가루 내어 사골같이 끓이신 만두다.
마지막으로 놀라운 봉평 유천 막국수 본점의 고기만두!!!!
유천 막국수는 80년대부터 주인 아주머니의 시아버지가 운영했던 가업이 내려온 곳이다. 지금도 아주머니가 직접 막국수를 뽑으시고, 만두를 빚으시고, 서빙까지 하신다.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손님이 없어 그러하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내오실때 손에 흥건히 물이 묻어있는 것이 혼자 아주 분주하게 일하시는 듯 했다.
딸내미가 비빔 막국수가 먹고 싶다고 엄마를 일차 꼬신 후 결론적으로는 수육을 먹을 셈이었던지라, 알며 속아주며 서울로 향하다가 들른 집이었다. 그다지 만두에 대해서는 별 기대가 없었다. 배부를 것도 같았고.
그런데, 이게 웬일! 만두가 내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만두피랑 고기랑 잘 뭉쳐져 있는 모양새도 그렇고, 고기도 잔뜩 들어 탱탱하고, 거기에서 뜨거운 육즙이 쭈욱 나오던 것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너무 맛있어서 황홀경에 빠진 나머지 정신없이 먹다가 그냥 "안녕히 계세요."하고 돈도 안 내고 나갈 뻔했다.
아주머니는 무척 수줍어하셨다. 만두 혹시 직접 빚으시냐고 했더니 맞다신다. 고개만 끄덕끄덕하신다.
- 매일 안 만들어요. 이것도 어제 그제 만들어 놓고, 냉장고에서 꺼내서 쪄드린 거예요.
만두 생긴 것도 주인 아주머님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안해'처럼 수더분하게 생겼다. 게다가 참 맛이 깊다. '맛이 깊다'는 것이 내가 썩 미식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고, 자꾸 삼삼하게 생각이 나서 그런 것이다. 재방문 의사 백프로 있음!!!
전혀 예상치 못한 이런 훌륭한 조연을 만나는 것이란, '숨어있는 만두 발굴'이라는 내 삶의 소확행을 충족시켜주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지금 여기에 올라온 조연만두들은 그저 나의 아주아주 사적인 '편견'에 따른 조연들이다.
데뷔한지 30년, 오랜동안 무명으로 연기생활을 하다가 크게 주목받고 있는, 현재 최고의 '조연 전문' 이정은 배우. 수많은 해 무명으로 연기해오던 세월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지금의 얼굴'을 만들어 낼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서 아니었나 싶다고 이야기한다. 기생충으로 너무 많은 주목을 받아서 겁이 났었다며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했는데, 기생충 마치고도 그 다음 작품, 또 그 다음 작품 몰입해서 열심히 해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기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일이 끊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이제는 내가 시나리오를 고를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지 않을까? 일이 없을 때의 불안감, 일을 하고 있을 때도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지않아 끊길 것 같은 불안감은 정말 지독하다.
그녀의 대사로 마무리지어보려 한다.
<눈이 부시게> 1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