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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재이도 묵고 살아야 조우를 뜨지

한지, 그 천 년의 세월을 뜨는 사람

by 황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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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에 삼식지소라는 곳이 있다. 전통한지를 만드는 무형문화재이신 김삼식 한지장의 전수관이다.
아홉살 무렵부터 종이를 뜨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의 '전통한지' 이야기와 그의 삶을 담은 자서전 초고를 완성했다.
2018년 12월 24일 시작한 인터뷰는 15회 정도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듬해 초여름에 끝났다. 즉, 서울에서 문경까지 3시간 길을 열 다섯 번 넘게 내려간 것이다.


약주를 좋아하셨던(과거형이라 아쉽다. 지금은 전혀 드시지 않는다고 한다) 김삼식 한지장은 인터뷰를 하러 가면 그렇게 후하게 대접해주셨다. 이런 것은 술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는 거라면서 내 손에 기어이 술잔을 쥐어주셨다. 게다가 어머님과 큰 따님의 음식 솜씨는 어마어마해서 워낙 다른 집 가면 새모이만큼 먹는 내가 정말 바지 후크를 풀고 먹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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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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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꼭 내가 좋아하는 배추적을 부쳐주셨다.


지금은 아들 춘호씨가 아버지의 전통한지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다. 현재 충북대학교 대학원에 수학중으로, 전통한지의 여부를 가름하는 '잿물'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문화재 연구소에서도 춘호씨의 연구 결과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자서전의 마지막 3부에서는 춘호씨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간단하게 목차를 소개해본다.


먹고 살려고 시작한 한지. 삶을 넘어 이제는 믿음이 되었다.

이제는 내 기억의 흔적을 남기고, 미래를 갈무리해 전하고 싶다.


[1부. 어제를 뜨다.]

김삼식 장인의 삶. 9살 무렵 한지를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를 담았다. 지금은 무형문화재가 된 장인의 어린 시절, 젊은 날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장인과 인터뷰를 하다보면 꼭 눈물을 흘리시는 때가 있다.

한겨울 한지 일 할때면 손이 너무 찹단다. 그럴 때마다 슬쩍 따뜻한 물을 옆에 놓고 가셨던 누님...
여섯 살 때부터 그 조그만 손으로 아부지 일을 도왔던 막내 아들 춘호씨... 엄마가 춘호씨 어려서 많이 아파서 손도 제대로 못타고 자라 그렇게 불쌍하게 여겨지신단다.

그리고, 한겨울 한지를 이고 장에 갔다가 폭설이 내려 한 장도 못 팔고 돌아왔던 열 다섯 살 때...

처음에는 단순하게 자서전을 쓰려고 인터뷰를 한 것 뿐이었는데 회차가 지나면서 이 과정이 장인에게는 일종의 치유의 의식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저 들어드리고, 녹취하고, 메모할 뿐이었다.


[2부. 오늘을 포개다.]

양심, 전통, 진실. 이 세 가지를 심는 삼식지소 이야기부터, 비로소 무형 문화재 한지 장인으로서의 한지 이야기가 담겼다. 한지 이야기를 할 때 장인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리고 삶의 한 막을 내리고 또다른 새로운 막을 여는 장인의 이야기.


[3부. 내일을 일구다.]

문경 전통한지 전수자 막내 김춘호씨 인터뷰. 우리 나라 전통의 '젊은 한지'에 대한 이야기다. 미래를 이야기한다.




과연 이 원고가 어떤 편집자의 손을 거쳐 한 권의 소중한 책으로 나올지 궁금하다

에필로그 작업을 하면서 김삼식 한지장이 부럽기까지 한 이마음. 그래서 원고 일부를 옮겨본다. 마치 박경리 선생님 나이 드니 너무 좋다시던 그 말씀처럼... 마지막 원고를 정리하다가 이렇게 후회없이 앞만 보고 살아올 수 있을까 싶어서 눈물이 났다. 김삼식 한지장의 생은 후회가 없다.
아 참! 종우, 조우는 종이의 경상도 사투리다.


발.jpg 예전에는 문경의 발 장인 최달용씨에게서 사왔다가 지금은 전주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종이.jpg 이게 진짜 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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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종우 뜬지 70년이 다 되도록 힘든 고비는 많았지만 먹고 사는 길은 종우 한 가지 뿐이라. 초년이나 중년이나 말년이나 다 종우로 시작해서 종우로 끝나는 거라.

두 번째는 사람의 마음인데 마음은 내가 10살 때나 77살 때나 똑 같애요. 남한테 싫은 소리 하기 싫고 남한테 속기도 싫고. 돈을 쓰는 것도 아들 논 후에 안식구 병에 다 떨어먹고 털려버린 거 그거 한 번 후회한 일 없고. 동학을 믿은 건 천지 부모님 덕택이라. 내 인간 생긴 꼬라지가 못되게 생겼지? 그것도 좀 도움이 된 거 같고.

내가 살아나온 데까지는 남하고 싫은 소리 한 적 없고. 남하고 싫은 소리 하면서 옷을 쨌다든지 영창을 갔다 왔다든지 그런 일 없었고, 재수 없게 걸려서 유치장 5일간 산 것 밖에 없고. 앞으로는 자식이 하나 들어와서 내 뜻을 잘 받아서 잘하고 있고, 나도 자식 말 듣고 대학에 대학원까지 보냈고. 나도 부모 노릇 할 만큼 했다 할 수 있습니다.

...
저도 학교를 배와 가지고 어데 가도 전통한지라고 하면 천지 부모님 덕택, 조상님 덕택이다 할 때도 있습니다.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걱정 없습니다. 살아가는 건 걱정 없으니까.

단 한 가지, 어느 누구든지 죽을 때 나 죽고 싶어요 하는 사람은 없을 기란 말이요. 나는 그건 겁 안 나요. 왜 그러냐 하먼, 내가 젊을 때 아프기도 마이 아팠고, 놀래기도 했다는 얘기 했지요? 그래서 몸이 한창 때도 50키로를 넘어간 적이 없어요. 그래도 힘은 장정보다도 더 마이 썼고. 어느 누구하고 경쟁을 해도 내가 다 따라잡고. 산판에 가서 돈을 벌어 밥 먹고 살았고.

...
내가 언제까지 살아야겠다는 욕심은 없습니다.

인생은 한번 났다가 한번 가는데 얼마나 살먼 남한테 도움을 주고 가느냐. 언제까지면 내가 만족을 하고 죽을까?. 아버지는 오십 하나에 돌아가셨는데, 나는 칠십 칠세까지 살았으니 이제 더 살아야겠다 덜 살아야겠다 하는 생각은 참말로 없어요.
욕심이 없으니 오래 살란지도 몰라요. 농암면에 사는 동갑들 중에는 다 죽고 다섯이 남았어. 그거 보면 내가 마이 살았는데, 지금으로서는 바랄 게 하나도 없어.


경운기.jpg 경운기를 몰고 있는 김삼식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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