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한 호사를 누려보고 싶을 때... 그 만두집
나도 몰랐는데 마음 속에 반골 기질이 있는지라, 무슨 미슐랭이니 파인 다이닝이니 하는 것 조금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만두집을 다닐 때에도 시장통에서 훈김 내뿜으며 열심히 빚어 파는 집, 조금 작고 허름하지만 손맛만은 끝내주는 집 위주로 다니고 싶었다. 결정적으로 지난 번 강남쪽 한 만두집에 갔다가 자리값을 친다 해도 만두전골의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더더욱 마음을 닫아 버리고 말았고. 미슐랭이고 나발이고 부자들만 와서 먹으라고 아예 판 깔아준 음식점이로구나 싶어서 말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는 정관계 인사, 고위 공무원, 변호사 등만 알음알음으로만 예약이 가능한, 일반 손님들은 받지 않는 음식점이 있다는 것을 지난 여름에서야 알았다.
그런데 미슐랭 음식점들도 나름대로 할 말도 많을 텐데, 다른 만두집은 한 군데라도 더 가보고 이야기 해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던 길이었다. 어느 좋은 가을날 부암동으로 향했다.
자하 손만두다.
들어가는 입구에 이렇게 고운 조각보가 여기는 자하 손만두집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우리집 창문에 예쁜 조각보를 걸어놓고 싶은데도 마땅한 것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고 있었는데, 여기서 만난다.
이 곳은 자하 손만두집 여사장님의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자리다. 1993년 사장님과 올케 둘이 의기투합해서 연 만두집, 파라솔 3개 펴서 등산객들에게 판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워낙 어려서부터 손이 큰 할머니 덕분에 명절마다 때마다 동네 잔치마냥 음식을 했었는데, 그 중 단연 안방 차지하는 음식이 만두.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만두를 빚는데, 늘 듣던 칭찬이 '만두 참 잘 빚는구나'였다고 한다.
이렇게 간판도 없이 주문 받아서 만두 만들어주던 가게는 어느덧 무럭무럭 커서 27년 뒤, 이렇게 '중견' 만두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들어가니 한 분이 발렛 파킹을 해주신다.
자그마한 내 차만 빼놓고 모두 대형 차량들이다. 들어가면서 우아한 사모님들의 위엄에 조금 눌렸더랬다.
사실 이 곳은 위치 상 대중교통으로 오기에 살짝 애매하기도 하지만, 먹고 맛있으면 마을 버스 타고, 산 건너, 물 건너 기어이 오기도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날씨까지 받춰주면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말미에 맛있는 식사로 마무리 할 수 있는 것일테다.
하도 볕이 밝아서 사진도 찍기 어려울 지경의 좋은 날씨였다. 평일 낮이어서 사람도 별로 없었는데, 소곤소곤 이야기해야 할 정도로 조용한 곳이다.
메뉴판을 한 번 둘러보자.
사진에서 보듯 만두들이 모두 하얀색이다. 김치만두도 하얀색... 특이한 메뉴로 '엄나무순 만두'가 눈에 띄었다.
산림청 계신 분께서 엄나무 순에 항노화, 항암 성분이 있다고 귀띔해주셔서 봄에 잠깐 날 때 구해서 만들어봤다고 하신다. (조선일보 김윤독의 사람 人 - 부암동 '착한 만두집' 이야기)
세상에 항노화에 항암 성분이 들은 식재료들은 깔리고 또 깔려넘치는지라 그냥 넘어갔을 법도 한데, 엄나무 그걸 잡아서 새로운 메뉴로 개발한 것이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만두 외에도 콩국을 이용한 음식, 수육 냉채, 빈대떡 등을 판매한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가격은 낮지 않다. 또한 이 집의 특징 중의 하나가 만두국과 떡만두국에 들어간 만두가 다르다는 것이다. 떡만두국의 만두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알록달록한데, 시금치, 당근, 비트로 색을 냈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색깔이 참 아름답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메뉴! 편수찬국이다.
바닥이 네모난 만두 편수를 시원한 양지국물에 내는 음식인데, 요것 참 별미일 듯 하다. 즉, 나는 이번에 갔을 때 시키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꼭 한 번 경험해보고 싶은 메뉴다. 냉만두국이라는 장르(?)를 아직까지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터라 궁금하다.
이 중, 모듬만두와 만두국을 주문했다. 예쁜 색깔의 떡만두국을 주문할까 하다가 어떤 블로그에서 '만두 맛은 그냥 만두국이 훨씬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휙 바뀌어 버린 것인데, 지금 조금 후회 중이다.
모듬만두에 나오는 고기 만두가 바로 만두국에 들어가는 만두인지라... 저 예쁜 알록이 달록이 삼색 만두에 조랭이 떡까지 맛 볼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 아쉽다.
그래도 다시 만두국에 오롯이 집중해보도록 한다.
기본적인 상차림이다. 역시 비싼(!) 만두집 답게 그릇 또한 하얀색 자기, 내가 딱 좋아하는 느낌의 우아함을 갖췄다. 물론 수백, 수천명의 손님이 왔다갔다 하는지라 자기가 살짝살짝 긁혔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자하 손만두의 또 다른 자랑. 바로 손수 담근 간장이라고 한다.
주변 어르신들도 그렇고 엄마도 이런 전통 장 담그기와는 거리가 먼 분들이라 늘 국간장, 집간장, 손수 담근 간장에 목말라(간장에 목이 말라?!) 했었더랬다.
그러다가 올해 가을 장 가르기를 하신 소울 프렌드(!)가 내게 간장을 선물해주어서 드디어 집간장을 음식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각각 3년, 2년, 그리고 올해 갈라서 달인 간장까지 넉넉히 챙겨주어서 요즘 신나게 국이니 무침이니 넣고 있다. 확실히 직접 달인 간장이 쓸 데 없는 단 맛 없이 가볍고, 맑고, 무엇보다 그 특유의 냄새 끝에 감칠맛을 남긴다.
자하 손만두의 간장을 살짝 맛보니, 달다. 잘 다린 간장 특유의 짜지만 단, 그런 맛이 있다.
배추김치와 깍두기 깔끔하게 그릇에 담겨 나왔다. 워낙에 김치 좋아해서 만두집 오면 한 번 더 달라고 할 정도다. 그리고 냉장고에도 적어도 세 가지 종류의 김치가 넉넉히 쟁여져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배추, 깍두기 혹은 석박지, 열무 또는 총각 김치 등등...
이날 먹은 김치는 아직 알맞게 익지는 않았지만, 신선했다. 이 집 김치는 워낙 맛이 깔끔해서 계속 리필해서 먹는다는 리뷰들이 많다.
드디어 주문한 만두국 등장! 먼저 그릇의 꽃무늬가 너무 예쁘지 않은가? 그릇에도 신경쓰는 집들, 그 정성 참 좋아하고, 대접받는 느낌 들어서 기분 또한 덩달아 좋아진다.
이 우아한 그릇 안에 커다란 고기만두가 7개가 가지런히 꽃 모양으로 담겨 나온다.
만두 위에는 양지를 잘 찢어낸 것과 실부추인지 파인지 모를 고명이 듬뿍 올려졌다. 잘 우린 양지국물도 시원하고...
고기 만두 자체는 육즙 뚝뚝, 화려한 맛은 아니었고, 역시 주인장의 인터뷰 기사 둘러볼 때마다 나오는 말 '덜퍽지게, 화려하게 음식하지 않는다'란 말 그대로였다. 담백하다는 말로도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런 소박하고 꽉 찬 맛이라는 표현이 나로서는 최선이다.
좋은 재료 즉 부드러운 두부, 기름기 많지 않은 고기, 신선한 숙주 이 삼박자가 잘 맞아 떨어지는 만두다.
그리고, 이 집은 고집스레 조미료 안 쓰는 집으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신세계 백화점 식당가에 입점해서 힘들게 힘들게 버티다가 그쪽은 접었다. 백화점 식당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입맛에 맞춰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 이 아름다운 모듬만두의 세계로!
소만두, 편수만두, 찐고기만두, 김치만두 네 가지가 한 접시에 나온다.
이 중 내 입을 완전 사로잡은 것이 바로 네 귀를 접어 만든 편수 만두였는데, 주재료는 소고기하고 오이다. 만두 안에 들어간 오이맛이 어쩜 그리 상큼하고, 소고기랑 잘도 어울리는지...
위에서 잠깐 이야기했던 이 편수만두에다가 시원한 양지국물이 담긴 요리를 다음에는 꼭 먹어봐야겠다는 생각 다시 한 번 더 해본다.
김치만두는 평소 내가 좋아하던, 쨍하게 맵고, 빠알간 그런 류의 동네 시장 만두집의 만두와는 사뭇 다르다. 역시 점잖게 맵고, 점잖게 하얗다. 김치 맛이 강하지 않지만 나름 깔끔한 맛에 또 집어서 맛보게 되는 신기한 맛이다.
쓰다보니 내가 너무 자하 손만두, 미슐랭 맛집이라고 긴장한 나머지 찬양 일색은 아닌가 싶어 뒷머리를 긁적이게 된다. 하지만 나의 만두 여행기를 읽어주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모든 만두집을 이렇게 찬양, 찬송한다. 흠숭마저 한다!!!
자하 손만두의 만두국은 한 그릇 15000원, 그리고 모듬 만두 또한 15000원이다. 낮은 가격이 아니다. 어떤 집은 만두국 한 그릇에 4000원 받는 곳도 있고, 7000원 받는 곳도 있지만, 이 집은 그 두 배, 세 배의 가격으로 친다. 농담으로 이 집 만두국은 8000원인데, 정성스런 분위기와 접대 받는 기분에 7000원을 더 얹는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주인장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썩 좋지는 않으시겠지만...
자주 가서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비싼 만두국이지만, 한 번 정도 호사를 누리고 싶다면 나를 이 곳으로 데이고 와서 스스로 셀프 대접해주는 것도 좋겠다. 혹은 좋은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도 이 곳, 주저않고 오시길. 아니면, 아이에게 점잖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을 때에도 자하 손만두집에 데리고 와서 분위기로 끌고 가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가, 다음 시험은 어떻게 준비하고 싶은 거니? 엄마랑 같이 이야기해볼까?
아, 이건 아닌가. 맛있는 음식 앞에 두고, 체하게 할 일은 아니니 말이다.
여하튼, 자하 손만두와 더불어 세상의 모든 만두집에게 천사가 내리길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