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4년의 내가 2021년의 나에게 고함.
오늘 드라마 공모전 본선 명단에도 제 이름을 발견하지 못하고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을 전국, 아니 전 세계의 한국말 작가 지망생 분들께 선배 작가로서 한 말씀 드려봅니다.
제가 이렇게 말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비오는 날 창문에서 떨어져 죽고 싶은 여러분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각본상 트로피를 떡하니 들고 작가가 되고 싶은 여러분, 저도 이렇게 탔어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힘 내세요. 따위의 멘트를 날리는 것은 사실 공모전 낙선으로 제대로 현타 맞아 난로 위의 오징어처럼 괴로울 사람들을 한 번 더 죽이는 짓이라 생각해서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여러분.
공모전 자꾸 떨어지면요, 그거 안 되는 거예요.
포기는 김장 담글 때도 필요한 단위지만요, 우리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광속으로 인생에 돌직구 날려줄 때에도 필요한 겁니다.
그냥 포기하세요.
공모전 말고 다른 데뷔하는 길 있겠지.
내 글을 알아봐주는 제작 관계자들이 있겠지.
없어요.
그 사람들이 공모전 심사합니다.
와, 이 사람 글 써야 해. 내가 꼭 제작사 어디 괜찮은 데 소개시켜 줄게요. 기다려 봐.
기다리지 마세요.
'제작사 괜찮은 데'란 없습니다.
괜찮은 곳은 다 공모전 해서 사람 뽑습니다.
그냥 이 길은 아닌가벼 하고 묵묵히 돌아서면 안 멋있으니까 그때 눈물의 소주를 한 잔 마시는 겁니다.
아버지의 소줏잔에만 눈물이 반, 이런 거 아녜요.
드라마 공모전 떨어진 사람들은 소줏잔 버리고 닥치고 글라스 꺼내세요.
거기다 소주 따르세요.
비오는 날 창문에서 활공할 생각 말고 그냥 소주 먹고 위장 녹아서 골로 가면 됩니다.
그리고 글라스 원샷하고 공모전 사무국에 전화하는 겁니다.
나 왜 떨어졌냐고.
그럼, 아마 폭풍 같은 쪽팔림은 있을지언정 다음 공모에 후회는 없으실 겁니다.
실력 안 돼서 떨어진 거예요. 네.
나의 실력을 의심하지 마세요.
그리고, 믿으세요!
아 참, 내 문법은 드라마 문법이 아닌가봐. 영화에 맞나봐.
아니예요.
그냥 여러분의 글은 페북에 최적화되어 있어요.
페북에 좋아요 2-300개, 껌이잖아요.
대사 연습한답시고, 순발력 키운다고 대댓글 숙제하듯이 다 달아주고 계시잖아요.
그냥 다시 예쁘게 글라스 들고 소주 따르세요.
아마 그거 몇 번 하다보면 포기도 알게 되고, 맷집도 생기게 되고, 오펜 사무국이니, jtbc 사무실이니 전번 다 외우고, 이제 kbs 드라마 국장네 족발 시켜먹는 데까지 알게 됩니다.
아, 그리고 반쯤 열린 커텐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11시 반쯤의 햇볕 한줄기가 내 시력에도 쒯이지만, 나를 아주 지대로 루저로 몰락시키는 데에는 최고의 심리적 장치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런 주제에 또 딸딸이 신고 편의점 가서 해장한다고 빙그레 빠나나 우유 하나 사서 숨도 안 쉬고 쭉들 빠시겠죠.
와 씨발. 인생...이러면서.
에유. 왜 그래.
그럴 때 주머니에서 땔랠랠래 땔랠랠래, 전화 오잖아요?
*** 작가님이시죠?
이럴 것 같죠.
아니예요.
엄마예요.
거기서 아 짜증나. 한 번 때리고, 다시 편의점 들어가서 참이슬 2병 달라고 하고 2800원 내고 나오세요.
그러고 집에 와서 놋북 켜고 페북 여세요.
죽고 싶다, 괴롭다 쓰고 페친들에게 위로와 치유 받으시면 됩니다.
그러고 나면 메일 한 통 올겁니다.
이번 저희 ** 공모전에 응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님의 작품은 비록 최종심 20편에 들지는 않았지만 본심 60편에 올랐음을 알려드립니다.
최종 20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도, 개별적으로 제작 관련하여 연락이 갈 수 있습니다.
더욱 정진하여 내년 공모전에서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후훗. 이게 인생입니다.
뭐 하나 깔꼼하게 한 방에 되는 게 없어.
오늘 제 환갑 잔치가 열립니다.
요즘 워낙 환갑 파티 같은 것 안 하는데, 드라마 종방연하고 겸사겸사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굿 럭.
희망 따위 개나 주세요.
2034년 5월 27일.
황서미 작가 드림.
***
5월 말만 되면 이 포스팅이 자꾸 출몰해서 씁쓸히 웃게 만든다. 내가 봐도 명문이다. ㅋㅋㅋ
그리고, 정확히 2년 뒤에 이 글에 나온 그대로 되었다.
2년 전 써서 묵힌 시나리오를 마감날에 날짜만 바꿔서 낸 것이니 다음에 이렇게 장난 치지 않으면 뭐 좋은 소식 있지 않겠나.
그리고 2034년에 환갑잔치는 하긴 하겠지. 이 글에 나온대로 종방연하고 함께 하는 기적이 이루어지면 더 좋고. 아니어도 뭔가는 계속 쓰고 있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