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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

프리랜서. 무명작가. 엄마. 여자. 또라이. 돈 많이 없는 사람.

by 황섬

지난 주 화요일 드라마 제작사와 회의를 하고 나서 심한 내상을 입었다. 내가 쓴 드라마는 도마 위에 올랐고,피드백을 준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리고, 굉장히 냉정했고, 맞는 말씀들로 계속 마음에 칼집을 내셨다. 피투성이가 되어도 우리는 너를 계속 찌르고, 단련시킬 테니 따라오라고 했으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저하게 그들은 '그들'이었고, 타인이었고, 나와는 같은 편이 아니었다. 내게 정확히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손을 놓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주었다.

- 저희가 고민을 좀 더 해볼게요.





나는 오늘 불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그날 이후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고, 기회가 코 앞에까지 왔는데 어처구니없게 멀리 떠나가게 생겼다. 이 상태로 함께 일 한다고 해도 나는 이들이 너무 무서워서 멘탈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왜 이 뜨내기 작가를 일으켜세워주지 못하는가. 처음에는 이 원망이 자욱했었고, 나중에는 '이 정도면 일단 내가 내 근육으로 일어서야지! 왜 못하냐, 이 멍충아!'라는 자책으로 괴로웠다.


고민이 없다.

이것은 명백하고, 치명적인 내 단점이었다. 고민이 채 익기도 전에 해결책을 내어 놓는 데에 바쁜 삶이었다. 고민까지 할 시간이 어딨어! 물속에서 숨이 막히기 전에 얼른 얼굴을 밖으로 빼 놓는 삶. 그런데도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쉴 수 없었다. 늘 헐떡였고, 늘 숨이 모자랐다. 그러니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나. 그럴 리 없다.

그 얕은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계속 나를 채찍질하고, 바쁘게 움직였다. 일도 한꺼번에 3-4개를 쳐내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래놓고 불평이 많았다. 혼자 서러워하기도 하고. 나는 먹고 사느라, 그리고 애 키우느라 고민하고, 내적으로 성숙할 시간조차도 없었다고 광광댔다. 핑계 좋다!


최고로 불안할 때는 돈이 없을 때, 혹은 돈이 없어질 예정일 때, 다음 달 돈이 들어올 곳이 없을 때였다. 무명의 작가에게는 아무도 줄을 서지 않는다. 내가 헌팅을 하러 다녀야 한다. 촉을 세워 카톡을 보내고, 메일을 보내고, 피드백을 기다렸다. 기다렸다. 또 기다렸다.

세 군데에 카톡을 보내놓고도 반나절이 지났는데 단 한 명한테도 카톡이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확률상 누구 한 명한테는 연락이 와야 옳은 일인데.... 이메일을 보내고 나면 나는 늘 수신확인을 누르는 것이 버릇으로 굳었다. 계속 빵이다. 안 봤다는 얘기다.

왜 나는 늘 이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하나. 누군가 별 부담 없이 카톡을 슥! 보냈는데, 까톡! 까톡! 까톡! 제깍 답변이 오는 인생, 승리자다. 이것도 하나의 권력이구나. 치열한 카톡 밀땅의 기선을 제압해버린 권력 말이다. 다음 달치 돈 들어올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미팅을 잡아놓고 나서야 조금 다리 뻗고 하늘을 본다.

그럼 작품에 대한 고민은 언제 하지? 돈이 입금되면 시작하나? 그것도 아니다. 그냥 써낸다. 이때는 또 시간이 없거든. 돈을 준 사람은 '빨리' 써내기를 바란다. 오히려 '빨리 주세요' 주문이 없으면 이제는 불안하다. 아, 내 작업물은 그쪽에서 그다지 간절한 것은 아닌가? 필요하지 않은 건가?


지난 주는 올해 계획했던 커다란 그림이 두 개가 와르르 무너지는 바람에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이 일, 저 일 모두 차질이 생겼다. 제대로 내 앞에 작업 요청을 하는 곳은 단 한 군데 남았다. 안타깝게도 그 일은 예전에 한 번 작업했던 것인데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던 일이었다. 내 이력에 그다지 도움은 안 될 것 같고, 시간은 많이 들고, 그만큼 월간 벌어내는 돈은 적은 일.

그런데, 사람 마음이 또 얼마나 웃기냐면 '흥! 내 커리어에 도움이 안 돼!' 할 때는 언제고, '와... 이 일 아니었으면 정말 벼랑 끝에서 톡! 치면 뚝 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맙기까지 하다.

여하튼 마음을 다잡고, 이제는 '좀 차분히 앉아서 끈질기게 고민하자'는 생각이었다. 시뻘건 용광로 속에 들어갔다가 뜨겁다고 바로 나와서 찬물에 퐁당! 들어가지 말고, 이제는 진득하게 달궈질 시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럴 나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오늘도 쓴다. 글 쓰고, 일하는 데에 멋있는 것이 어딨고, 천박한 것은 또 어딨나. 모두 나에게 생업, 돈을 벌어다 주는 소중한 일이다. 잠시 그걸 잊었다. '선택과 집중'도 좋지만 나는 아직 그럴 군번은 아닌 데도 무슨 경지에 이른 줄 알고 '선택'을 하려고 깝쳤다. 한없이 겸손하다 못해 쫄아 있는 것도 보기 딱한 일이지만, 조금 살만하면 뭐나 되는 줄 알고 혼자 감동하고 잘난척하고 있다가 이리 한 방 맞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돈 되는 일은 다 맡아서 하는' 정도의 위치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일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새인가 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불안은 나를 좀 더 가라앉히고 고개를 숙이게 하는 좋은 재료지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 한참 마음이 불안한데, 애들이 옆에서 밥 달라 그러고 그 옷 왜 안 빨았냐고 채근하고 돈 달라 그러면 얼마나 힘들다구. 얼마 전에는 친구들하고 마라탕 먹으러 간다고 만 원 이체좀 해달라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적이 있었다. 당장 들어올 돈들이 우수수 밀리는 바람에 계좌에 빵원 있었으니까. 하하하! 진짜...


프리랜서. 작가. 엄마. 여자. 또라이. 돈 많이 없는 사람.

지금의 나다. 찌질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럽자.

좀 전, 보내둔 카톡 중 하나에 답이 왔다. 내일 오후 3시에 미팅을 하잖다. 그래서 힘이 좀 나서 글을 써본것이다. 모두에게 굿 럭.



찰리: 우리들 한 번 사는 삶이야, 스누피.

스누피: 틀렸어! 한 번 죽는 거지. 우린 매일을 살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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