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엄마와 영화를 보러 갔다. 거리두기 때문에 떨어져 앉아야 할 줄 알았지만, 영화관에 가보니 두 좌석씩 붙어있고 그 사이에 거리두기 좌석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 한 가족이 등장했다. 중년의 엄마, 아빠 그리고 장성한 아들은 화목해 보였다. 그런데 우리 앞줄에 앉으려던 그 가족은 곧 난감해했다. 그리고는 거리두기 좌석을 무시한 채, 세 명이 나란히 앉았다. 가족의 화목을 굳이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2시간 동안 떨어져 앉는 게 그렇게 억울하고 불만이었을까?
이렇게 사회적인 윤리, 약속을 자기들의 편의로 깨고,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사람을 우리는 진상이라고 부른다. 국립국어원을 찾아보니 정확한 어원을 알 수 없는 신어(新語)로서 '못생기거나 못나고 꼴불견이라 할 수 있는 행위나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 정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꼴불견들은 서비스업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카페나 식당에서 종업원들에게 별 것 아닌 일로 시비를 거는 손님들의 일화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곤 한다.
줄곧 사무직으로 직장생활을 해온 나는 딱히 진상에게 당해본 경험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간접적으로 그 감정을 느낄 만한 일이 있었다. 우리 부서에는 나이 많은 남자 차장님이 있다. 줄곧 현장에 계시다 오신 터라, 서류 업무에는 밝지 않았지만, 아저씨들만의 능글(?) 맞은 정치력과 꼰대력으로 그럭저럭 사무실에 적응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분이 아침에 매우 안 좋은 얼굴로 씩씩 대며 출근하셔서는, 자리에 앉아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xx 구청이죠?" 생각보다 큰 목소리였고, 마침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 통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거기서 왜 딱지를 끊습니까." 주차 딱지를 뗀 모양이었다. 뭔가 억울하게 뗀 걸까? "요새 코로나 때문에 자영업자들 힘들어하잖아요. 이런 시국에 굳이 내가 식당에 팔아주러 갔는데.. 원래 그 동네 거기는, 식당가는 사람들이 주차하는 곳이에요. 아니, 그런데 딱 저녁시간에 단속을 합니까? 낮에는 단속한다해도, 저녁이잖아요. 그리고 당신 같은 철밥통 공무원들은 칼퇴해서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직장인들은 퇴근하고 가면 그 시간이라고요. 그러니까 좀 여유 있게 저녁시간은 피해서 단속해야지. 사람들이 그렇게 유도리가 없어요. 어? 어! 정부에서 그렇게 재난지원금 줘가면서 소비 촉진하려고 하는데 밑에서 뭐 하는 거야. 생각이 없는 거 아닙니까?" 듣는 내내 어이가 없었다. 들어보니 주차공간이 아닌 곳에 주차를 했고, 시간이 어찌 됐든 그건 본인이 잘못한 게 맞았다. 그런데 되레 공무원을 들들 볶고 있었다. 그 통화는 비슷한 내용으로 약 10여 분간 이어졌다. "알죠. 직접 단속하신 것도 아니고, 뭐 이걸 경감해줄 수도 없다는 거 알아요. 근데 우리 시민이 당연한 권리로 제안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뭐 내가 이걸 못 낸다 이런 건 아니고, 거 참, 듣는 태도가 그렇네. 암튼 윗분들한테도 다시는 이런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좀 제도를 조절해달라는 거죠. 뭐... 수고하시고요. 암튼 잘 새겨들으세요." 그리고는 선심을 쓰듯 전화를 끊었다. 듣는 나는 낯뜨거웠지만, 그는 하나도 부끄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시민의 도리를 다한 양 의기양양했다. 10여 분간 당사자가 아닌 내가 들어도 이렇게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그 통화를 받았던 공무원은 어떠했을까? 이런 짜증을 유발하는 게 '진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진상 행위는 자기가 손해나 피해를 봤다고 생각할 때 벌어지곤 한다. 그런데 정당한 항의와 진상의 차이는 뭘까? 차장님이 그 지역 구청장에게 항의 전화를 걸 수 있었을까? 전화를 걸 수 있던 건 항의를 받는 당사자가 별 말 못 하는 하급 직원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방이 더 높은 권위나 권력을 가졌거나, 다수라면 항의하거나 요구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진상은 상대방과 나의 권력 위치에서 결정된다.
오히려 정당한 불만도 진상으로 싸잡아 폄하되어 외려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가 있다. 가끔 우리 사회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 특히 소수자들의 항의를 불편하단 이유로 진상으로 취급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 회사 근처는 시위가 참 많은 곳이다. 물론 코로나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시위가 거의 없지만,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아달라, 권위를 보장해달라는 시위가 거의 매일 열렸다. 그러나 근처 직장인들에겐 그들의 이야기가 소음 공해나 교통체증의 원인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상이라고 명명만 안 했을 뿐이지, 심리적으로 이미 그들을 그렇게 낙인찍어놨다. 그들은 절박해서 나온 것이었을 텐데..
["장애인 범죄 집단"으로 이직한 이유]라는 도발적 제목의 영상을 봤다. 그 영상의 주인공 변재원 씨는 움직임이 불편한 장애인이었지만, 한예종을 나와 서울대 석사를 따고 구글 코리아의 인턴까지 한 소위 사회에 잘 적응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코로나 이후 일반인들에겐 '삶의 불편'의 문제가, 장애인들에겐 '삶의 위협'의 문제로 다가오고, 그럼에도 대중들은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의 정책국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