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먼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촉촉 Apr 19. 2021

기억이 남긴 상처, 그리고 치유

먼-데이 에세이 15. 기억

기억이란 건 참 웃기다. 외우려고 애쓰는 영어단어는 안 외워지고, 어학연수 때 농장에 가서 일했다가 들었던 성희롱은 기억에 남는다. 10년 이상 키웠던 초롱이의 건강했던 모습은 사진으로만 남아있고, 무지개다리 건너기 전날 새벽, 어둠속에서 사지를 바들바들 떨던 초롱이가 가끔 기억난다. 나름 애주가이지만 회사 술자리에서 좋았던 기억들은 없고, 직장상사가 했던 술주정과 거래처 사장의 성희롱에 데여서 직장에선 절대 술 안 먹는다. 나를 좋아했던 풋풋한 첫 남자친구와의 좋은 추억보다는, 내가 구질구질하게 잡느라 눈물만 흘렸었던 구남친과의 안 좋은 기억이 더 선명하다. 


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선명하고, 구체적일까?

콜럼비아대학교 르네 헨(René Hen) 신경과학 교수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생존에 꼭 필요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기억한다. 특히 뇌는 위기나 두려움을 매우 중요한 정보로 여기고, 장기기억으로 저장해서 과거의 위기를 반복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한다.

연구팀이 쥐로 실험한 내용에 따르면, 새롭고 무서운 환경에 놓인 쥐의 뉴런(뇌의 신경세포로 정보를 전달, 저장 하는 역할)은 무서운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곧장 뇌의 장기기억 저장 장치인 편도체로 전달했다. 그리고 하루 뒤, 연구팀은 쥐가 겪은 무서운 경험과 비슷한 환경에서의 쥐의 해마 뉴런 활동을 관찰했더니, 쥐의 뇌 속 모든 해마 뉴런들이 과거의 기억과 동기화된 것을 발견했다. 즉, 그때 느꼈던 감정과 감각 등 관련 기억들이 모두 소환되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를 ‘기억의 동기화’라고 표현했고, 이 '기억의 동기화'가 좋지 않은 기억이 길고 강하게 남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얼마 전 세월호 사건 7주기였다. 물론 이번 해에도 세월호 사건에 대한 특집 기사들이 나왔지만, 점점 줄어든다는 생각을 했다.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참사 등등 불행한 참사들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점점 잊히듯,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예 잊어버리면 안 될 사건인데, 몇몇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기 위해 노력하고, 심지어 그 잊지말자고 이야기하는 유족들을 폄훼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사실 이 사건 이후 우리는 단체로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란 충격적이거나 두려운 사건을 당하거나 목격하는, 극심한 '정신적' 외상을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불안장애이다. 그 정신적 고통이 너무 커서 그 상황이 지나갔음에도 계속 지나치게 과민해지고, 불안해하며 그 비슷한 상황에 대해 아예 회피하는 등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장애가 나타날 경우 PTSD로 진단한다. 
<세월호 사태 관련 소셜미디어 이용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논문에 따르면 세월호 사건은 전통적인 뉴스 매체뿐만 아니라 소셜미디어 등에서 다양한 정보와 사진, 동영상 콘텐츠들로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여과 없이 실시간으로 많은 이들에게 공유되었다. 이런 경쟁적인 보도 행태는 단순 정보 정도가 아니라, 수장되는 배 안에서 보내온 현장 영상과 울부짖는 유가족들까지 생생하게 보게 만들었다. 즉, 모든 국민들이 그 위기 상황에 노출되었고, 자신들도 모르게 피해자 심정에 동화된 것이다. 결국 그 심각도는 다르지만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취재하는 언론인, 세월호 학생들과 공통점을 가진 수많은 학생들, 일반 지켜보는 국민들 모두가 일종의 PTSD를 겪게 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PTSD 환자들은 과거의 기억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상황에 노출될 때마다 해마 뉴런들이 과거 기억과 매우 강하게 동기되고, 결국 좋지 않은 기억을 잊는 것이 더욱 힘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기억에서 묻고, 회피하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답일까? 비슷한 상황을 봤을 때의 동기화를 선택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회피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 언제라도 다시 당신을 자극할 수 있는 폭탄을 남겨두는 것이다. 


예전에 극단 고래의 <빨간시>라는 연극을 본 적이 있다. 고 장자연 씨 사건과 위안부 할머니의 사건을 소재로 한 극이었다. 연극에서는 직접적 피해자와 심지어 방관자까지도 모두 그 기억으로 힘들어한다. 특히 이 극의 메인 하이라이트는 위안부였던 할미가 일본군 성노예시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놓을 때 일 것이다

극에서 치매 노인으로 나오는 할미가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담담한 목소리로 속에 담아둔 너무나 끔찍한 기억들을 꺼내 놓을 때, 몇십 년 동안 속으로만 쌓아야 했던 그 아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관객들 모두 울었다. 그러나 할미는 눈물은 맺혔지만 울지 않았다. 그냥 내 아픔을 잊지 말라고, 회피하지 말라고 전하고 있었다.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랬다.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치유가 돼. 치유되지 않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다른 이의 고통으로 흘러 다니게 돼."



흔히 망각은 축복이라고 한다. 사실 망각은 가장 쉬운 해결책처럼 보인다. 세월호도 그렇게 빨리 묻어버리려고들 한다. 하지만 망각은 상처를 덮어놓을 뿐이다.



출처 :https://news.zum.com/articles/62213743 

https://ko.wikipedia.org/wiki/%EC%99%B8%EC%83%81_%ED%9B%84_%EC%84%B1%EC%9E%A5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61819

http://www.samsunghospital.com/home/healthInfo/content/contenView.do?CONT_SRC_ID=09a4727a8000f2e0&CONT_SRC=CMS&CONT_ID=1523&CONT_CLS_CD=00102000100

https://brunch.co.kr/@choiyn0623/27



먼- 데이 에세이란?

'먼'데이마다 애'먼' 사람들에게 글을 뿌리는, '먼'가 할 말 많은 사람의 글

매거진의 이전글 눈으로 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