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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촉촉 Jun 07. 2021

명함

먼-데이 에세이 22. 퇴사

위이잉....

분쇄기가 돌아간다. 서류가 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조각으로 변해간다.

나는 지난주 꽤 오랜 시간을 분쇄기 앞에 있었다. 내가 냈던 기획서와 각종 공문, 그리고 만났던 사람들의 명함과 나의 남은 명함들까지 꽤 많은 것들이 분쇄기에 갈려나갔다.

나는 퇴사를 한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말 그대로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월급이 다른 친구들보다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부족하지도 않았고, 크게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정년도 보장되었다. 게다가 야근이나 주말출근이 거의 없어서 워라밸이 좋고 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맡은 업무의 내용도 회사의 문화·교육행사, 포럼을 기획하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는 일이라 오롯이 숫자와 씨름해야 하는 회계팀보단 자유도가 높으면서도 실제 실행을 맞는 대행사보단 업무강도가 낮았다. 가끔 바쁠 때 빼고는 퇴근 이후 학원을 다니거나 공연을 보는 취미도 즐길 수 있어서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한 구석은 항상 다른 것을 갈망했다.


 물론 맨 처음엔 불안하고 오랜 1년 반의 취준 생활을 끝내고 취업에 성공한 터라 마냥 기뻤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연애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연애에 대한 막연한 기대로 동네 연극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런데 이게 내 삶의 방향을 바꿨다. 시작할 땐 연기를 배운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는데, 매주 활동을 하다 보니 내가 살면서 느끼지 못한 끌림을 느꼈다. 또, 그때부터 연극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내 심장을 떨리게 하는 좋은 연극들을 만났다. 어느샌가 거의 본업이란 느낌으로 동호회 활동을 한 것 같다.


사실 남들은 그냥 취미를 좀 많이 열심히 하나 보다고 생각했지만 꽤 오래전부터 나는 연기를 하는 연극배우나 연극 기획을 하는 사람이 되는 꿈을 가졌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너 작년에도 회사 그만두고 연극하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못했지? 그럼 못하는 거야."
그랬다. 항상 희망찬 꿈과 미래에 대한 다짐이 있었지만 실천은 되지 않았다. 퇴근 후에 연기학원이나 희곡 쓰는 수업들을 두드려봤지만, 냉정하게 말해 취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남들은 퇴근 이후에 이렇게 못해'라며 스스로를 대단한 듯 추켜세우기도 했고, 꽤 많은 돈을 꿈에 쓴다는 것에 '내가 그만큼 준비를 했어'라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근데 몇 년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되돌아보니 허울 좋은 겉치레였다. 

 그러다가 꽤나 진지하게 연기학원을 다니게 된 후, 매년 하던 진로 고민에 변화가 생겼다. 원래는 연극 관련 대학원에 합격하거나 꽤 좋은 극단에 들어가게 되면 회사를 그만둘 작정이었다. 이런 마음을 먹은 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마치 나에게 로또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리라 하는 태도였다. 근데 학원을 다니며 내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깨달았고, 좋은 극단이나 대학원을 가기 위해 이미 수많은 지망생들이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것을 알았다. 기로에 놓였다. 포기할지, 꿈을 향해 더 노력할지.


그래서 더 노력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내 꿈을 이루는 방식으로 로또보단 적금을 선택한 것이다. 만기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꾸준히 넣다 보면 보상을 받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연극과 관련해서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사무 기간제 계약직으로 골라 지원했다. 오히려 채용공고를 낸 회사에서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 안정적인 회사에서 긴 경력과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으면서 6개월 사원 계약직으로 지원했는지 궁금해했다. 또, 지원한 직무가 극단의 일보단 행정일이 많아서, 생각만큼 재밌거나 흥미롭지 않을 것이란 얘기도 했다. 그러나 내겐 연극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준비운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고 결국 합격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이 응원해주셨다. 평소 내 고민을 알고 계셨던 상사는 물론이고, 일로 엮였던 많은 사람들과 주변 친구들, 가족들도 다소 무모해 보이는 선택을 응원해줬다. 결정하고 퇴사 일자가 정해진 이후에도, 크게 실감이 안 나다가 인수인계를 끝내고 내 자리를 정리하면서 각종 서류들을 분쇄하니 정말 퇴사가 실감이 났다. 꽤 두툼한 기획서와 제안서들에는 내가 회의 때 적었던 수많은 낙서와 아이디어가 적혀있었다. 내가 보냈던 공문 사본에는 내가 회사의 이름을 빌어 요청했던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다. 특히 명함 분쇄가 꽤 오래 걸렸는데 7년여간 만났던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사람들도 있고, 나중에 인맥으로 활용하면 좋겠단 생각이 드는 분도 있었다. 다 보관해서 가져갈까 했지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내가 다니던 회사의 힘이었다. 


나는 어떤 회사에 소속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내가 이직할 회사도 말 그대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연극계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이제 내 명함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들어섰다. 




먼- 데이 에세이란?

'먼'데이마다 애'먼' 사람들에게 글을 뿌리는, '먼'가 할 말 많은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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