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빛으로 세상이 밝아졌다. 알록달록 색깔이 보이고 물건의 형태가 보이고 그림자를 통해 입체감이 드러난다. 내가 당연하게 살고 있는 일상이 축복이자 선물이자 희망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어둠이 가져다준 공포와 불안, 빛이 가져다준 고마움과 안도는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 절망이 밀려올 때 백신으로 사용하리라.
끊어진 전선은 전문가의 손길로 복구되었다.
1층 매장에서 텐트를 펼치고 잔 세 딸들은 꿀잠을 잤다고 앞다투어 자랑이다. 카우랑 함께 잘 수 있어서 좋았고 카우도 깊이 잘 잤다며 흐뭇해한다.
첫째 "엄마, 카우가 결막염이 있는 것 같아. 이거 치료해 줘야 된데. 치료비도 얼마 안 한데."
카우 눈 한쪽이 뭔가 작은 막으로 끼여있다는 것은 보았는데 그게 결막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중성화수술도 시켜주고 싶고 수술시키는 김에 건강검진이라도 받아볼까 싶어 동물병원을 검색한다. 하필 휴일이라 휴진인 병원이 많았고 먼 거리를 운전하면 24시간 진료를 볼 수 있는 병원들도 있긴 하다. 그래도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어 계속 검색을 하니 옆동네에 오늘 진료가능한 동물병원이 있었다. 주차장도 넓어서 고민 없이 옆동네 병원으로 향한다.
처음 들어선 동물병원은 특유의 강아지 냄새가 났지만 금방 적응되었다. 친절한 간호사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대로 카우의 묘적사항을 적는다.
이름 : 카우
성별 : 암컷
나이 : 모름
병원을 찾은 이유 : 건강검진, 중성화수술
많이 적고 싶은데 아는 게 없다. 그래도 간호사선생님께서는 괜찮다며 서류를 받으신 뒤 카우를 안고 진료실로 들어가신다.
몇 분이 흘렀을까.
간호사선생님 "카우 보호자님, 들어오세요."
카우 이름을 외부인이 불러주니 우리만의 소속감이 들어서 좋다. 결과도 좋아야 할 텐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선다.
안경 낀 남자 의사 선생님께서 무뚝뚝하게 맞이하신다. 카우를 어떻게 만났는지 물으셔서 길고양이라고 말씀드린다. 키울 거냐고 물으셔서 키우지는 않고 임시보호 차원으로 데리고 있다가 자연으로 보내 줄 생각이라고 말씀드린다. 책상 위에 삐죽 튀어나온 진료표를 보니 카우의 몸무게가 보인다. 440g.
의사 선생님 "이빨이 이만큼 자란 걸로 보아선 생후 2개월 되었고요, 누가 암컷이래요?"
나 "강아지 키우시는 직원분께서 암컷이라고 알려주셔서 알았어요."
의사 선생님 "수컷입니다. 어릴 때는 생식기 구분이 어려워서 잘못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간의 결막염이
있지만 어른 고양이가 되면 사라질 수 있으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구충제도 먹였고 건강은
나쁘지 않습니다. 중성화는 생후 1년 뒤에 하는 편이니까 차후에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 "아, 1년 뒤에나 가능한 거군요. 건강상 이상도 없다고 하시니까 정말 다행이에요. 고양이 눈
주변이 지저분한 건 어떻게 씻겨주면 되나요? 목욕시켜도 되나요?"
의사 선생님 "눈 주변은 물티슈로 살살 닦아주시면 되고 요만한 아기고양이는 목욕해도 괜찮은데 어른고양이는
할퀴고 달려들 수 있으니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나 "아, 그럼 해도 된다는 거네요. 고양이 모래 같은 것도 있다던데 어떻게 배변훈련시키면 효과가
좋아요?""
의사 선생님 "집에서 안 키우실 건데 배변 모래 사지 마세요. 그냥 오며 가며 음식만 주세요. 다이소에 사료며
모래는 다 팔기는 합니다."
'아, 내가 집에서 안 키운다고 했지...'
나 "많이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 "오늘 진료비는 안 받겠습니다. 길고양이라고 하셔서요."
나 "아... 아...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뚝뚝하시던 의사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선생님의 태도는 한결같으신데 나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그런데 나는 배변모래를 사러 가야 하는데, 다이소가 바로 길건너에 있는데, 도로 출입문으로 나가야 가장 빠른데, 배변모래를 사지 말라고 하셔서 사러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는 꼭 사주고 싶다. 건물 엘리베이터를 향한 출입문을 이용해다이소로 빙 둘러간다. 배변모래, 사료, 박스에 깔아 둘 매트를 산 후 다시 길을 건넌다.
진료비를 받지 않으신 게 마음에 걸려 동물병원 바로 옆 카페에 들어가 카페라테 두 잔을 포장한 후 병원에 가져다 드린다. 이제 마음이 한결 가볍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기고양이 몸무게를 검색한다. 생후 2개월이 되면 무게가 어느 정도일까 계속 궁금하던 참이었다. 인터넷 정보에는 생후 2개월이면 800g에서 1200g 사이가 평균이라고 적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카우의 몸무게는 고작 440g이니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약하게 태어나서 어미고양이에게 버림받은 게 맞는 것 같다.
차에 실린 용품들을 꺼낸다. 박스 안에 매트도 깔고 아이스박스 안에 배변 모래도 깔고 배가 고플까 봐 우유에 사료를 태워 부드러운 밥을 준비한다. 하지만 카우는 배가 고프지 않은지 바로 돌아선다.
텐트 안으로 들어가 걷고 앉고 눕던 카우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토하기 시작한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토하는 걸 보니 구충제 때문인가 싶다. 속이 안 좋아서 밥도 안 먹은 것 같다. 이어서 대변 누는 자세를 하길래 큰 딸이 카우를 안고 배변 모래가 있는 주차장으로 데려간다. 모래 위에 카우를 내려놓는다. 촉감이 어색한지 카우가 모래 박스를 탈출한다. 남편 차 밑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더니 카우가 사라졌다. 불러도 대답 없고 차 밑을 수십 번 엎드려봐도 카우가 없다. 차 안으로 들어갔나 싶어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었지만 30분이 지나도 나오질 않는다. 어제 낮에는 분명 10분 뒤에 매장으로 스스로 찾아왔는데 1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밤공기가 차가워 잠바를 꺼내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카우를 찾기 시작한다. 둘째가 카우와 자주 놀던 공원도 돌아봤는데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름을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 카우가 큰 소리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평소 목소리가 작으니 야외에서는 더 찾기가 어렵다.
다시 매장으로 돌아간다. 내일 장사를 위해 펼쳐진 텐트를 남편과 정리한다. 화장실에 가져다 둔 칫솔과 치약도 챙긴다. 흐트러진 테이블 줄을 맞추고 의자도 깊숙이 밀어 넣는다. 사용한 컵들은 설거지를 한다. 이렇게 정리를 다 할 때까지도 카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애가 탄다. 차사고만 나지 말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래, 너는 길고양이니까 우리 집보다 넓은 세상이 더 좋겠지. 너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해 미안해.
가끔 놀러 와 줘, 건강해야 돼.'
매장에 조명을 끈다. 매장 문도 잠근다. 몇 시간 동안 켜놓은 자동차에 시동도 끈다. 혹시나 돌아올지 모를 카우를 위해 주차장에 배변 모래상자와 잠자리 박스를 가지런히 놓는다. 음식 그릇을 그 옆에 놓고 집으로 올라간다. 내일이 일요일이라면 하루종일 기다릴 수 있는데 하필 월요일이라 내일을 위해 아이들도 재워야 하고 아침밥도 미리 준비해야 하고 출근도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발걸음이 너무 무겁다.
집에 올라가서도 창문을 열어 매장 앞을 확인하고 옆창문을 열어 주차장을 확인한다.
카우가 없다.
또 창문을 열어 매장 앞을 확인하고 옆창문을 열어 주차장을 확인한다.
또 카우가 없다.
10분 간격으로 계속 확인하는데도 카우는 보이지 않는다.
녹화된 cctv를 휴대폰으로 돌려본다. 남편의 차가 커서 화면이 많이 가려지니 너무 아쉽다. 나머지 빈틈이라도 뚫어져라 확인한다. 자동차 밑으로 빠져나갔다면 나가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아무래도 건물 벽에 붙어서 빠져나가 화면을 벗어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