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작은 철학가

삶의 에너지 걷기에 대하여

by 새벽일기
운치있는 풍경을 걷다



시간이 날 때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내서라도 해야 한다. 나는 원래 운동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스트레스를 푸는 법은 퇴근길에 맥주 한 캔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러다 삼십 중반 무렵부터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에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허리 통증이 심해졌다. 속기는 지구력과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라 체력 유지가 필수다. 이십 대까지는 거뜬히 다섯 시간까지도 연이어서 속기를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두 시간이 지나면 온몸이 꽈배기처럼 꼬이고 현기증에 시달렸다. “정년퇴직을 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발적으로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처음 유산소 운동을 할 때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모니터로 TV시청을 하면서 걸어도 5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헬스장에서 천국의 계단이란 기계를 오를 땐 지옥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겨우 한 달 지속하다가 지루해서 그만 둘 것이라 예상이 됐다. 고민 끝에 야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걷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즈음 내가 읽었던 책이 <걷는 사람, 하정우>와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다고 바람을 갖게 되면 어떤 책은 운명처럼 내 곁으로 다가와 있다. 책과 사람도 다 인연이 있는가보다.


녹번동에서 홍제천까지 가기 위해 홍제동의 산골고개를 넘을 때였다. 경사가 있는 언덕을 오르려니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허벅지에 힘이 빠졌다. 그러다 저 멀리 산 능선을 바라보며 옛날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그 많은 고개를 넘어간 선비들을 떠올렸다. “잘 닦이지도 않은 흙바닥 길을 짚신 신고 건너려면 발바닥이 온통 물집 투성이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현대시대에 태어난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다리에 다시 힘이 붙기 시작했다.


유진상가 육교에 도착해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홍제천의 맑은 물줄기가 아래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와 북한산의 풍경, 개천가에서 경쾌하게 물이 흐르는 리듬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이거야말로 자연이 내게 선사하는 ASMR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육교를 내려와 본격적으로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좌로는 물이요, 우로는 꽃길이 나를 반겼다. 담장길 따라서 형형색색의 장미꽃들이 화려함으로 눈길을 끌었다. 노란색, 분홍색, 빨간색과 초록색의 이파리들이 어우러져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코끝까지 풍겨오는 은은한 장미 내음이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것 같았다.







물가에는 청둥오리 가족들이 옹기종기 붙어 여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다. 머리를 180도까지 뒤로 홱 돌려 부리를 등에 파묻고 상념에 빠진 녀석도 보인다. 거북이는 따사로운 햇볕을 맘껏 쪼이기라도 하듯 평평한 회색 징검다리 돌 위에서 등껍데기를 노릇노릇 굽고 있다.



자연의 풍광을 누리면서 하루의 일과도 정리한다. 아침에는 콘크리트 건물로 향하는 사람들 곁을 투명인간처럼 스쳐지나간다. 나라는 존재 또한 잿빛으로 연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퇴근 후 운동복과 발이 편한 런닝화를 신고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땐 서서히 잿빛은 자취를 감춘다. 자연이 보여주는 에너지와 각종 생물들. 하늘 끝자락부터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색색깔의 향연이 내 마음을 다독여 준다. 자연이 그리는 예술 앞에서 에너지도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걷기 시작한 이후의 삶은 앞만 보고 걷던 나에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선물했다. 오늘도 걷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나는 도심 속 작은 철학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