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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Apr 17. 2018

21세기에 어떻게 그렇게 잔혹할 수가 있어?

낙원에서 낙심하다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요. 생명을 훼손하는 것이 그다음이요. 죽음이 그다음이요. 생명이 억눌리는 것이 가장 낮은 것이다”. <여씨춘추>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간이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를 원한다면, 바로 자신의 존엄성을 타인을 통해 인정받는 것일 테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이 ‘명예’를 지키는 것이 가족원의 ‘살인’보다 중요할 지경이니, 정말 경우에 따라 생명보다도 귀하게 여겨짐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사회에서 명예살인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던 지난 2016년, 파키스탄의 한 일간지에 흥미로운 칼럼이 하나 실렸다. 글쓴이는 ‘명예’에 대해 고찰하며 자신이 방문했던 한국을 언급하는데, 물건을 훔쳐가는 범죄가 거의 없다고 소개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소지품이 사라지는 파키스탄과 달리 서울은 공공장소에서도 시민들이 편하게 자신의 물건을 내려놓고 볼일을 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파키스탄 기자는 한국이 잘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며, 서울에도 폐휴지나 고철을 모아 근근이 살아가는 빈민층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절도질만큼은 하지 않는 정직한 시민성은, 이 외국 언론인의 눈에 좇아야 할 이상향이자 자신들의 현실과는 대조되는 ‘지상낙원’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다를까?    


    정말 안전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무너져 내린 것은 최근 ‘미투’ 운동을 보면서다. 성폭력 및 성희롱에 대한 폭로가 연예계, 정치권, 교육계, 예술계 가릴 것 없이 사회 곳곳으로 번지고 있다. 파키스탄 언론인의 눈에 비친 ‘명예의 나라’, 폐품을 팔지언정 결코 남의 물건엔 손대지 않는 나라,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의 위엄을 스스로 지키며,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 나라의 실체가 이것이었나.  


    낙망에 빠졌다. 해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명예’라는 이름 아래 은밀하게 목숨이 단축되는 것이 결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권력적 갑을관계와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개인의, 집단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부정과 은폐와 맞물린 일그러진 모습이 여기, 우리에게도 있었다.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성들이 권력 아래 유린되어 목숨보다 중요한 존엄성을 짓밟히는 인격적 살해를 당해오고 있었다.



죽여야만 살인일까


    이 폐습이 존속하고 반복적으로 발생되게 하는, 거시적인 차원의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그 첫째는 위계, 위력으로써 이뤄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집단의 문제를 개개인의 갈등으로 치부하는 편리성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명예 살인이 많이 발생하는 나라에서는 여성에 대한 살해를 대개 가족 내부의 문제로 간주한다. 한국사회에서는 피해자의 잘못된 처신 문제로 몰아간다. ‘먼저 꼬리 흔들고 유혹한 것이 아니냐’ 수군거린다. 그뿐일까. 피해 사실을 밝혔다가 명예훼손 전과자가 되진 않을까, 아니면 직장에서 쫓겨날까 성폭력 피해자들은 도리어 움츠러든다. 아직까지 이슬람 국가에서 명예살인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이 땅에선 다수의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렇게 보니 파키스탄과 한국, 엇비슷하다.


    아니, 다시 보니 우리가 더 못한 나라다. 검찰 간부에게 당한 성추행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는 검찰 조직 내부로부터, 그리고 일부 여론으로부터 "꽃뱀"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손가락질에는 주변 사람들과 외부의 사람들까지 여럿이 참여했다. 행위의 집행자가 제한된 소수에 불과한 명예살인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성폭력과 그 은폐의 과정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인격살해다. 그래서 사회적 현상으로선 명예 살인보다 ‘미투 운동’이 훨씬 더 포괄적이다.


    또한 더 파괴적이다. ‘미투 운동’에서는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거나 회사로부터 불리한 조처를 받는 2차 피해가 빈번히 일어난다. 가해자가 지키고자 하는 ‘명예’가 명예살인에서 ‘가족의 명예’에 그쳤다면, 성폭력 은폐에선 ‘갑’의 명예, ‘회사의 명예’가 된다. 이런 권력적 집단의 명예는 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더 추상적이며, 더 큰 영향력을 지닌 ‘명예’를 위해서 직접과 간접의 방식으로 인격살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잔혹할까

  

    명예를 중시한다는 사람들이 가득하지만 정작 그 ‘명예’는 무자비함을 옹호하는 데 사용되는 세태에 오늘날 이슬람의 여성들은 고통받는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한국의 여성들이 아파하고 있다. 그들이 암흑 속에 던져졌을 때 가해자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살기 위해, 직장을 계속 다니기 위해,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폭력 앞에서 개인적인 죽음을 감내했다.  


    파키스탄의 칼럼니스트는 한국인들이 늘 자신에게 정직하다고 치켜세웠다. 그리고 이슬람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꼬집었다. 정직함이 결여된 채 지켜지는 명예는 결국 권력을 유지하려는 야만적인 수단만 남아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공동체를 얼룩지게 하기에.


    그동안 ‘명예’를 지킬 권리는 누구에게 있었던 걸까. 약자의 절규에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름만을 지키려는 야만적인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명예’를 이제라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용기 낸 증언자들에게 빼앗긴 명예를 돌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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