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의 미학

집 짓다 말고 밤 하늘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by 소문자cho
일처리가 느리기로 알려진 중동 문화. 오명일까? 빨리빨리에 익숙한 모두에게 바치는 글.



중동 문화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칩팔십년대 중동 시장에 처음 진출했던 한국인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I.B.M.


모 IT회사가 아니라, ‘인샬라(Inshallah)’ ‘부크라(Bukhra)’ ‘말리시(Malish)’의 머리글자를 딴 조어다. 이 세 단어는 아랍인들이 매일같이 쓰는 말들이고, 우리 같은 외국인들의 속을 자주 뒤집어 놓는 말들이다.


시간까지 올 수 있냐는 말에 ‘인샬라(신神의 뜻이라면)’라고 대답한다. 앞에서 후진하다가 범퍼를 박아온 놈은 ‘말리시(걱정 마)’라고 한다 (내 범펀데...?). ‘부크라(내일)’래서 다음날 다시 오면, 또다시 ‘부크라’란다. IBM은 2000년대에도 여전하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고,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될 테니 좌우지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이 여유의 철학은 ‘빨리빨리’의 민족과 상극인 것이 분명하다.


답답했다. 나는 물어야 했다. “제대로 말해줘. 인샬라가 무슨 뜻이야. 기야 아니야.” 파키스탄 벗이 말했다. 그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라고.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기지만, 예컨대 엄마가 말할 땐 거절이라고. “엄마, 핸드폰 바꿔줘.” “인샬라." 대충 이런 상황을 상상.


“그러면 왜 맨날 부크라라는 거야. 언제나 내일부터 시작하는 다이어트 같은 거야?”라고 물었더니, 내일보단 나중이라는 뜻인데, 세상만사가 신의 의지에 달렸으니 콕 집어 어느 시각을 약속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고 그는 반문하였다. 복잡한 일이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복잡한 계산은 저녁 초대를 받았을 시에 따랐다. 요청받은 시각보다 한 시간 언저리의 시간을 지각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식사 시간을 저녁 10시라고 가정했을 때 아무래도 이른 시간에 초대받았다면 더 늦는 것도 용납된다. 모두가 초대 시간에 맞춰 도착하면 편리할 텐데, 여기선 편리한 게 다르다.


나는 '신속정확' 민족의 예의를 지키려다 너무 일찍 도착한 적이 여러번 있다. 그중 한번은 호스트가 아직 다른 손님들이 오려면 한참일 테니, 옥상에서 차를 준비해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파키스탄의 예절인 것 같았다. 가을 밤하늘이 선선하니 감상할 만하다고 했다.


옥상에 올라갔다. 눈에 띄었던 건, 공사를 마친 지 몇 년이 되었다는데도 마감하지 않은 철근들이 고스란했다는 것이었다. 왜 바닥을 매끈하게 다듬어놓지 않은건지 궁금했다. 인더스트리얼 스타일(Industrial Style)인가.


짜이에 설탕을 듬뿍 부어내던 집주인이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마감 공사를 하지 않아.
지금 이 집은 2층이지만 내 아들 세대에 가족이 늘어나고 재산이 늘어나면 우린 3층, 4층으로 건물을 올릴 수 있으니.
그래서 기초 공사도 튼튼하게 해 놨지.
네가 보는 2층짜리에서 우린 4층, 5층을 보고 있지.



IBM이니 뭐니 동작이 느리고 ‘구시대적’으로 알려진 사람들에게서, 썩 멋진 이야기가 아닌가. 어쩌면 오늘의 밥벌이에 매몰되어 ‘빨리빨리’에 익숙한 외부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재단하는 건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공의 우화가 떠올랐다. 90세 노인 우공이 집을 가로막는 산을 파서 옮기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것도 두 개나. 마을 사람들은 우공이 제정신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공은 이렇게 말한다. 아들과 손자와 함께, 대대손손 노력하면 옮길 수 있다고. 그러면 언젠간, 나의 후세대는 넓은 길로 다닐 수 있다고. 그러니 일을 시작하기 충분한 이유가 아니냐고.


무슨 일을 꼭 자신이 이루겠다는 고집을 부리지 않는 이 자세. 조바심을 낼 필요도,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다는 우공의 자세가 다시 느껴졌다. 일의 성공을 꼭 나 한 사람에 의해 이루려고 하는 마음보다, 내 때에 완성되지 않아도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덕목이 느껴지는 옥상이었다. 힘을 쭉 빼고도 꿈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가을 밤에 터를 가꾸면서 후세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배웠다. 중동의 느릿느릿 문화를 한국어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이건 어떨까. 우공이산(愚公移山). 노력하면 언젠간, 이루어진다. 때로는 씨를 뿌리는 것으로 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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