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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Apr 21. 2018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가 맞잖아?

21세기 블랙리스트

1.


    그들은 공항 블랙리스트였다. 나는 매번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 뒤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기다렸다. 나의 친구들은 심문을 받거나, 구석의 방으로 불려 가 가방 속을 열어서 보여주어야 했다. 우리는 고등학생이었고, 모의 유엔 대회 참석차 이동 중이었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옷가지와 과자가 든 짐을 풀어헤쳐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다른 의심 정황이 있었을 리가 없다. 피부 색깔이 문제였다. 파키스탄 국적이 낙인이었다.  


“이렇게 생기면 다 탈레반인 줄 안다니까.”  


한바탕 곤욕을 치른 친구들은 자조 섞인 목소리를 뱉어냈다. 그리곤 익숙한 일이라며 멋쩍게 털어냈다.


    911 이후에도 이따금 일어났던 테러는 한번 터질 때마다 그 끔찍함에 전 세계를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분노에 빠뜨렸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벌어지는 테러에 대한 공포가 커져질수록 공항의 삼엄함은 더해졌다. 명분이 테러 가능성 차단이라면 어떤 검색 절차, 어떤 수색도 용인되었다.


    고백건대, 나도 이 분위기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면야, 생각했다. 한번의 참사를 막을 수만 있다면 이슬람교도들을 샅샅이 살피는 것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번 조심을 기하는 것이 최상의 예방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파키스탄 친구들 앞에서 하기엔 미안한 생각이라 굳이 나누진 않았지만 말이다.


    나는 마음 한 켠이 찜찜했다. 친구들의 편을 들어주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자꾸만 지난 테러 추모행사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지구촌과 함께 아파하던 파키스탄 친구들의 모습이 기억났다. 내가 그 진심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의심으로 마주해도 될까.


    그러나 금세 순응하고 생각을 타협했다. 그래도 불편감을 조금씩 감수해준다면 점차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으로 작게 싹튼 물음을 덮었다. ‘아무래도 무슬림들의 테러 소행 확률이 더 높아서 그럴 거야…’



2.      


    방과 후에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한 현지 영자 신문사가 있었다. 그곳에 기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아리프’였다. 아리프 기자는 영국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나름 수재였다. 기자로 활동하면서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고 했는데,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의 내막은 들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아리프가 자기 형 이야기를 했다. 1980년대 영국, 어릴 적 집 앞 놀이터에서 놀다가 스킨헤드 한 놈이 형의 목에 칼을 찔렀다고 했다.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그 후로 십 년쯤 흘렀을 땐 “파키”라며 아리프를 찌르려 한 놈이 있었다. 1990년대 그 시절 “아리프”라는 이름보다 익숙했던 “파키”는 뜯어낼 수 없는 거대 이름표 같이 그에게 착 붙어서 그를 온전히 가려버렸다.

 

    그는 언제부터 블랙리스트였을까. “파키”라고 불린다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공적 생활로부터의 배제를 의미했다. 그리고 차별의 관행뿐만 아니라 무슬림은 영국 문화와 공유하는 가치가 없으며, 서구보다 열등하며,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폭력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의견을 포함하기까지 확장되었다. 파키스탄에 테러조직 같은 게 생겨나기 훨씬 전에 말이다.


    아리프는 그래서 고향을 찾아왔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차별의 굴레 밖에서 자신의 존재를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3.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겨울, 크리스마스에 서울 시내의 난민촌을 방문했다. 거기서 한 파키스탄 기자를 만났다. 잠깐의 대화에도 굉장히 학식이 깊으신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난민 신청 후 법원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을 취재하다가 그들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수차례 위협을 당했다고 했다.

  

    많은 파키스탄 사람들은 만나봤지만 그가 갖췄던 무게감과 교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아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눈빛에서는 다정함이 느껴졌다. "요주인물이나 "감시 대상자"와 같은 무서운 이름표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공들여 일궈온 조국을 두고 그 땅을 부당하게 장악한 소수의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도망치듯 온 심정은 어떤 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많은 동료들이 숨졌다고 했다. 나지막하게, 그들에게 빚졌다고 했다.


    나는 우리에게 닥친 안전 문제 때문에 이슬람교인들을 경계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갈등은 911 테러로부터 잉태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갈색 인종과 그 외 인종 간의 갈등만 있는 것도, 어느 한쪽의 일방적 가해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시작을 알 수도 없이 오래전부터 인류에 심겨 온 차별의 새 단장이었을 뿐. 진심을 보여준 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쌓고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나 역시 그들에게 빚졌다.

0.


    2011년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테러가 있었다. 범인은 어느 '압둘라'도, '무함마드'도 아닌 "브레이비크(Breivik)". 백인이었다. 그는 학창 시절 왕따였는데, 심하게 이지매를 당하던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를 구해줬다고 한다. 그 친구는 파키스탄계 이민자였다. ‘파키’에게 도움받은 것이 굴욕적이었으며, 자신보다 열등하기로 업신여겼던 친구에게 보호받은 일이 너무 수치스러웠던 브레이비크는 이 일을 계기로 신체적인 강인함을 키우는 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극우 과격주의 단체에서 활동하던 중 폭탄 테러와 총기 난사로 77명을 살해했다.  


    한 인터넷 포럼에 "테러리즘(terrorism)의 반대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수많은 대답 중 높은 추천 수를 기록했던 의견은, 포용(acceptance)이었다. 그렇다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우리’를 단순히 보호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닐테다.


    지구촌에 쭉 위협이 되고 있었던 건, 배척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감정적인 이유로, 크고 작은 이름표를 붙여서 서로를 바라본 왜곡의 부작용을, 우리는 곳곳에서 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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