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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Jul 06. 2019

러시아 예술은 뭐가 다른데?

액자라는 정성

    출근길 버스 안 스마트폰으로 보는 영화와 소위 영화 상영관의 명당, 뒤에서 네 번째 줄 가운데 자리에서 보는 영화는 그것이 같은 매체로 같은 이야기를 담았을지라도 다른 경험을 안겨준다. 모든 경험은 주변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다. 그래서 사진이나 그림을 전시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액자에 담는다. 아무 액자여서는 안 된다.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할 액자, 그것을 바라볼 사람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느낌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내용을 승화하는 테두리를 고른다.


    그래서다, 모스크바 거리 화가들의 그림이 모두 액자에 끼워져 있는 이유가. 요즘은 캔버스 자체만 벽에 걸거나 기대는 전시 방식이 유행인 듯함에도, 러시아에선 맨 테두리를 드러낸 캔버스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미술관에서 볼법한 앤틱 원목 몰딩을 몇 겹씩 둘러놓았다. 주로 금박 은박이다. 오돌토돌 무늬가 아주 정교하다. 외무성이 있는 아르바트 거리, 한 작품 앞에 서서 관심을 보이면 눈치 빠른 화가가 재깍 가판의 뒤쪽에서 한아름 나무 작대기들을 가지고 나온다. 그림의 액자를 떼내고 다른 테두리를 차례대로 대준다. 디자인을 섞는 것도 가능하단다. 이런저런 코디를 제안해 보여주며 어떻게든 너희 집에 아주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을 심어준다. 옷가게 직원 같은 싱크로율을 자랑하지만, 이분은 엄연히 예술가다.


    러시아 발레의 전당, 볼쇼이 극장. 그 안에선 이런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대체로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고 믿는 편인데, 러시아인들은 내용만큼이나 그것을 담을 그릇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쓰는구나. 고개를 직각으로 쳐들면 천장의 거대 샹들리에가 보인다. 이 샹들리에를 중심으로 7층 높이의 객석이 둘러져 있는데, 덕분에 어디에서 보아도 화치한 광경이다. 바람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크리스탈 조각들이 알알이 수 놓인 불빛을 사방에 흩뿌린다. 천장에서 시작되는 빛은 주변의 디테일을 밝힌다. 어디까지? 붉은 벨벳과 황금띠로 치장된 좌석부터 무대 건너편 차르(황제)가 앉던 귀빈석까지. 귀빈석은 홀로 휘장이 마구 쳐져 있고 그 위엔 차르의 상징이자 러시아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가 앉았다. 이 정교한 공간은 공연 관람의 경험을 높일(enhance) 액자가 된다.

 

    그림에서 액자를 분리한 채 감상하지 않듯이, 가장 역동적인 무대만큼이나 배경인 극장 공간 자체가 경험의 일부분이 된다. 그리고 모든 액자가 당연히 그래야 하듯이, 볼쇼이 극장은 무대를 적절히 감쌌다. 내부의 모든 장식은 무대를 중심으로 거의 완벽히 대칭을 이뤘다. 곡선으로 둥근 벽이 안정적인 분위기를 일구는데 한몫을 한다. 외관은 그리스 신전을 바라보는듯하다. 여덟 개의 흰 기둥이 우뚝 줄 맞춰 서있다. 이곳은 아폴론의 신전 인지도 모르겠다. 태양의 신 아폴론은 음악의 신이기도 하니, 이곳이 적당하다. 앞발을 힘껏 든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몰고 가볍게 하늘로 날아가는 그의 모습에선 신의 위엄을 너머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무장해제된 감정을 극의 이야기에 온전히 실은 채, 그도 이곳에서 울고 웃었을까.

 

    시간에 바래 기억에 희미해질 공연 내용이라도, 볼쇼이에서 관람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극장 전체가 하나의 액자다. 그리고 액자는, 내용을 보강할 뿐만 아니라 인상을 주관하고 경험을 통째로 규정하는 그림의 일부이자 화룡점정이다. 그러니 화가에게 그림의 액자를 선택하는 일은 구매자에게 휙 넘겨버릴 부수적인 일 일수가 없는 노릇이다. 매년 300여 회의 공연을 감당해온 극장이다. 300여의 화폭을 걸맞게 담으려면 어떤 액자여야 할까. 볼쇼이 극장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러시아의 예술은 관객을 맞는 그 순간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러시아의 예술은 감상하는 이들을 각기 다른 경험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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