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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문자cho Oct 13. 2020

[prologue] 파키스탄 항공 타본 사람?

고등학교 3학년, 내 인생에 파키스탄이 뛰어들었다. 아빠의 발령이 매번 그랬듯, 갑작스러웠다.


이민 가방 여러 개를 공항 밴 트렁크에 싣고 나니 아빠가 물어왔다. 여권 챙겼느냐고. 나는 대충 끄덕였다. 이번엔 엄마에게 물었다. 카드 챙겼느냐고. 엄마가 카드만 챙겼을 리가. 엄마는 된장 간장 고추장도 챙겼다. 전날 집 앞의 마트가 이상하게 비어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갔더니 거실에 마트가 있었다. 짐이 한 개씩 올라갈 때마다 반동으로 주저 내리다가 앞뒤로 꿀렁꿀렁하는 이 밴에 살림과 마트 한 채를 욱여넣는 데 성공한 장본인이다. 아빠는 자신도 미션을 완수했다는 듯 비장하게 재킷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인쇄된 비행 일정이었다. 손가락으로 한 명씩 짚어내며 세 식구의 비행기표임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아빠의 뿌듯한 표정에서 이 여행의 난이도가 어렴풋이 느껴졌다.


인천 출발, 그리고 중국을 경유하는 여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파키스탄으로는 직항이 없다. 중국남방항공을 타고, 베이징에서 갈아타는 일정에서 몇 글자가 눈에 띄었다. 파키스탄 국제 항공. 나는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Pakistan International Airlines, 줄여서 PIA. ‘이런 것도 타보네’라고 말하려던 순간, 엄마가 “파키스탄 항공 괜찮은 거 맞냐”고 물었다. 아빠는 다 확인을 했으니 일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호언했다. 엄마는 레이오버 시간이 길어지면 어묵이나 만두피 같은 냉장식품이 녹을까봐 걱정하느라 글쎄 어떤 확인을 거쳤는지는 되묻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중국에서 파키스탄으로 환승하는 사람들이 우리 셋 뿐이라니. 베이징 공항에 내려서 터미널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 때우기가 시작됐다. 4시간. 조금 딜레이. 5시간. 조금 더 딜레이. 7시간. 파키스탄 항공의 비행기는 몇 번이나 딜레이 되었다. 출발 시각이 늦춰질 때마다 엄마의 만두피 걱정이 커졌다. 그 사이에 공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제갈길로 사라졌다. 정탐을 다녀온 아빠가 낭보를 전했다. “비행기가, 뜨긴 뜰 거래. 게이트를 알아왔어. 가 있자.” 짐을 끌고 불이 반쯤 꺼진 덩그런 터미널을 걸었다. 거긴 되게 넓게 느껴졌다. 깊은 새벽이 다 돼서 조촐하게 열린 게이트. 출발 안내방송도 없고, 줄도 없었다.


후에 알게  사실인데, 파키스탄을 살아도 파키스탄항공을 타는 일은  없다. 타이항공을 타고 태국에서 경유를 하면 여행 시간도 짧고, 아시아나 마일리지도 쌓을  있고, 서비스도 좋고, 파키스탄에선 구할  없는 돼지고기도    있다. 그래서 다들  편을 택한다. 파키스탄항공을 타고 부임한 우리 가족은 숫한 궁금증을 샀다.  파키스탄항공을 탔어요? 사람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남편이 그렇게 예매를 해서요.  파키스탄항공으로 예매했어요? 사람들은 아빠에게 물었다. 표가 있길래요. 복잡하게   없다구요.


PIA 비행기에 들어섰다. 일등석은 앞쪽 두줄. 그 뒤로부터 일반석이 시작됐는데 일등석이랑 같은 크기와 기능의 좌석이었다. 차별점이라곤 좌석의 색깔, 그리고 일등석은 한 자리씩 띄어서 앉혀준다는 것뿐. 이런 상황이라면 일반석에 앉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좌석 옆구리에 찐득한 먼지와 부스러기, 그리고 볼펜 같은 것이 끼어있어서 일등석도 이런지 궁금해졌다.


승객들은 기내에 들어서면서 서로와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그들이 처음 본 사이인지 궁금해졌다. 인사가 몇 분씩 걸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복도에 서서 한참을 수다 떨어도 뒤에 선 승객이 기다려주었다. 그러다가 사람이 너무 밀려서, 좌석에 앉아달라고 부탁하려고 온 승무원이 수다에 동참하기도 했다. 남의 동창회에 온 느낌이었고, 비행 내내 그랬다.


비행기가 울퉁불퉁한 하강을 시작했다. 좌석 벨트를 움켜쥐고 기체가 작아서 흔들리나보다, 생각했다. 조금 뒤, 계단을 우당탕탕 미끄러져 떨어지는 것 같은 비행기 안에서도 승객들은 수다를 이어나갔다. 아무 일도 없단 듯이 초연한 승무원을 보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 순간, 엄마가 다시 물었다. "괜찮은 거 맞냐"고. 아빠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지난 13년간 추락사고가 없었대. 내가 다 확인했지”. 나는 13년 전에는 무슨 일이었는지 걱정을 할 뻔했지만 엄마는 정말 그것까지 알아본 게 대견하다며, 아빠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추켜세웠다. (사족: 사고는 그로부터 7년 뒤인 2020년에 다시 일어났는데, 사고 원인으로 연료를 아끼기 위해 급강하하는 관습이 내부에서 지목되었다.)


그렇게 아빠의 믿음대로, 우리 가족은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 무사히 도착했다. 낯선 태양이 들끓는 곳. 이 타지에서의 삶은 예전 같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은은하게 번졌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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