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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초야 Oct 26. 2022

여름과 돌봄 교실

돌봄 교실 1

잊을 수 없는 여름이었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긴 더위였다. 

올해 여름은 지독했던 1994년 여름처럼 한반도 역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 여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름

2018년 8월 8일.

나는 지금, 방학의 한가운데에 있다.


알람이 울렸다.

8시다.

오늘은 평소보다 4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지구의 중력보다 사회적 약속을 거스르는 것이 무서웠던 것일까, 

방학 내내 누워만 있어 뻣뻣해진 척추를 하나씩 세우며 침대를 벗어났다.


방문을 여니, 내 방과는 사뭇 다른 기류의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벌써 가족들이 나갔는지 거실이 고요하다.

물기가 남아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완성형에 가까운 보름달이 보였다.

어젯밤에 라면을 먹거나 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부을 일인가 싶다.

어차피 부을 거 이제부터는 마음 놓고 라면을 먹기로 했다.

오늘 밤에 먹을 라면을 고민하며 샤워기를 잡았다.


평소라면 시도하지 않을 차가운 물로 샤워를 시작했다.

나에게 찬물 샤워는 여름 액티비티와도 같다.

365일 중 가장 더운 보름 정도의 기간에 내 몸이 차가운 물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샤워와 함께 여러 잡생각들을 씻어내며 빠르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현관문을 열고 뜨끈한 공기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온도의 공기였다.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동안 다시 땀으로 샤워를 했다. 

내일부터는 아침 샤워를 생략하려고 한다.

모든 땀구멍에서 나오는 액체들로 지도를 그리고 나서야 출근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의 겨드랑이는 한 시간가량 바깥바람을 쐬지 못할 듯하다.




돌봄 교실


나는 지금 한 초등학교의 운동장에 서있다.

초등학교라는 역에 발을 디딘 게 10년 만이라 그런지 기분이 머쓱하다.

머쓱함과 동시에 평온함도 느껴진다.

처음 와 보는 초등학교인데 참 신기한 일이다.


어색한 발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동측 건물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에 불 켜진 교실이 하나 있었다.


'저기가 돌봄 교실인가?'

두근대는 내 하트 비트에 맞춰 노크를 한 후, 3초 뒤에 미서기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국가근로를 하게 된 김지은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어른이 나를 반갑게 맞아줬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다.

초등학교에서 어린이가 아닌 어른들은 대부분 선생님일 테니까.

아 이것도 나만의 편견일 수 있겠다. 반성해본다.


다행히 나의 추측대로 그 어른은 어제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희은 선생님이었다.

희은 선생님은 땀으로 얼룩진 내 티셔츠를 보고 흠칫 놀라시더니, 에어컨 명당으로 나를 에스코트해주셨다. 그리곤 어딘가로 사라지셨다.


에어컨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선생님이 다시 오시길 기다렸다.

이 정도 풍속과 온도라면 45분 뒤쯤에는 겨드랑이를 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걷어갈 즈음 긴장감이라는 것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첫 출근 날에만 느낄 수 있는 형태의 것이었다.


'맞아 나 여기 일하러 왔지'

정신을 차리고 교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교실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어린이들이 앉아있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범벅된 눈빛들이 나를 흘긋 흘긋 쳐다봤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의 콧구멍이 확장되었다. 귀여운 걸 보면 콧구멍이 커지거나 윙크를 하는 버릇이 있다.


 윙크 대신 눈웃음을 쥐어짜며 어린이들과 조금씩 아이컨택을 시도했다.

나와 가장 오래 눈을 맞춰주는 어린이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희은 선생님께서 시원한 녹차 한잔을 가지고 내게 오셨다.

그녀는 나에게 냉녹차를 건네며 돌봄 교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그제야, 내가 일할 돌봄 교실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희은 선생님의 설명을 빌려 보자면, 돌봄 교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학생들이 등교 전후로 모이는 교실이라고 한다. 맞벌이 부모님을 둔 학생들을 학교에서 케어해 주는 것이다.


 좋은 제도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어머니는 가정주부 셔서 하교 후에는 항상 나와 오빠의 간식을 챙겨주시곤 했지만, 맞벌이인 부모님을 둔 친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꽤나 많은 친구들이 바로 학원에 보내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부모님을 기다렸다고 했다.


 내가 일하게 될 학교는 약 10년 전 돌봄 교실을 최초로 운영한 시범학교였다. 

희은 선생님은 이 학교에 돌봄 교실이 생길 때부터 함께 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설명에서 돌봄 교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을수록 이번 여름, 돌봄 교실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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