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 4번 169~171 마디의 왼손에 부치며
쇼팽 발라드 4번 169~171 마디의 왼손 구간에는 반음 내려간 레(d flat)를 시작으로 장음계 선율이 곱게 펼쳐진다. 발라드 4번을 연습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연주 버전은 조성진이었다. 그는 이 구간을 레가토로 연주하되 매끄럽다기보다는 부드럽게 뜯는 하프처럼 연주했다. 저음에서 고음으로 올라가면서 소리의 알맹이는 더 여물되 무게는 부력을 받는 듯 가벼워진다. 잘 익은 노른자를 말캉한 흰자가 감싼 모양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는 단선율이다. 그러나 단선적으로 누르는 건반으로는 감흥을 끌어낼 수 없다. 터치 전부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이 소절의 터치는 유독 신경 쓰였다. 그가 표현한 것처럼 여물게 익은 소리가 탄력 있게 날아오르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앞서 건조하게 뚝뚝 끊기는 소리를 보완하려고 페달을 더했지만, 레 플랫(d flat)에서 다음 옥타브 파(f)까지 분별없이 섞이는 소리도 바람직하진 않았다. 곧, 페달을 뗐다.
암보까지 마치면서도 감정을 음색에 녹여내는 것에는 여전히 미숙하다. 치기만 하면 글자가 입력되는 키보드처럼 계이름의 입출력에 연연한다. 이는 마치 아이유의 ‘밤편지’를 삑사리 없이 음정만 맞춰 부르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이 노래를 부르려면 사랑하는 이의 창에 반딧불을 보내는 마음부터 그려봐야 하지 않을까. 피아노도 마찬가지이고. 노래하듯 연주하려면 심상은 필수다.
레슨에서 선생님은 해당 구간의 소리가 좋다고 말씀하셨다. 기뻤다. 단 세 마디이지만, 고민한 흔적은 고스란히 연주로 드러난다. 무심하게 지나간 부분은 대충 뭉친 소리가 나고, 세심하게 교정한 부분은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피아니스트 김정원이 빈의 음악학교에서 발라드 4번으로 첫 레슨을 받은 일화를 떠올린다. 코다를 집중 연습한 그는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레슨실에 들어갔다. 그러나 연주는 첫음 ‘솔’을 누르자마자 제지당했고, 내리 솔만 치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마침내 <적절한 솔>이 나오자 선생님은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셨다고. 그 후 그는 피아노가 건드리기만 하면 같은 소리를 내는 단순한 기계가 아님을 깨달았다고.
내친김에 발라드 4번 도입부를 살펴보자. 솔-솔-솔-솔-파-미-미-레-도-미. 1 옥타브에 걸친 ‘솔’이 3번 연속 나온다. 악보상으로는 완전히 똑같지만, 첫음과 두 번째 음, 두 번째 음과 세 번째 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연습 초창기에는 태엽을 감은 발레리나 오르골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했고, 나중에는 안개가 자욱한 먼 바다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고동 소리를 상상했다. 서서히 물들며 번지다가 차츰 명징해지는 소리를.
가수는 목소리, 작가는 문장력이라면 피아니스트는 음색이 아닐까. 음색은 연주자의 터치에게 달려 있고, 터치는 예민한 귀를 필요로 한다. 퇴근 후 연습실로 간다. 옆방에서 모차르트의 <작은별 변주곡> 첫 소절로 짐작되는 ‘도도솔솔라라솔’이 지나간다. 다음 마디로 넘어갈 법한데 도도솔솔이 반복된다. 그도 음을 <찾고 있나 보다>. 연습이란 결국 프레이즈 하나, 마디 하나, 음 하나에 머물면서 차근차근 이뤄지는 법이다.
지난 6월, 발라드 4번으로 나간 연주회를 곱씹는다. 셋잇단음표로 이어지는 뒷부분 2도 화음을 포함해 부족함이 많았다. 무엇보다 음색을 충분히 표현한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아무래도 같은 곡으로 다시 연말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발라드는 겨울이잖아?
지난해 8월부터 올해 6월까지 11개월간 발라드 4번과 함께 했다. 그를 알기엔 한참 모자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