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의 유일한 교훈
사랑이 뭐라고, 사람이 변하지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사건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일어났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지만, 지난 연애가 그러했듯 지난 사랑도 불시에 찾아왔다. 감정이 잦아들 때쯤 주변에서 뿌린 잿가루에 스무 살 이후로 소거된 줄 알았던 질투까지 키웠다. 다행히도, 찬바람이 불 때쯤 도착하지 못한 감정은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 안의 뭔가가 변해버렸다.
불안과 의존은 나와 무관한 단어였다. 상대에게 맞출 의사도 적었고, 상대가 내게 맞추는 것도 거북스러워했다. 연애는 가장 내밀한 영역 바깥에서의 협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출입통제구역이야. 중간에 오솔길에서 만나자고? 어쩌지. 그 시간엔 정원에 모종 심어야 하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연애가 끝날 때까지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돌려받지 못한 마음은 자아에 결핍을 생성했다. 서른이 넘어서도 사람이 바뀌는구나, 깨달았다.
비로소 마음을 포갤 수 있던 때
S는 자신의 실패한 사랑에 대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컨디션이 좋거나 유난히 공감 능력이 치솟았던 몇 번을 제외하고는 대개 응, 응 하면서 듣곤 했다. 가끔 답답함이 몰아치면 ‘시간 아까우니 얼른 네 몫의 좋은 사람을 찾으라’고 채근했다. 일방향의 사랑은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홀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귀로 친구의 음성을 듣고 있었으나, 친구의 심정 위에 내 마음을 포갤 수는 없었다.
그 망연한 마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된 때는 똑같은 상태에 처하고 나서였다. ‘감정이란 꽃은 짧은 순간 피어나는 것’. f(x)의 노래 가사처럼 개연성 없이 솟아난 감정은 수습하지 못한 교통사고 현장처럼 너저분했다. 폐쇄회로 화면을 돌려보며 단서를 수집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지난한 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범인과 달리 상대에게는 책임이 없었다. 오롯이 멋대로 좋아한 사람의 몫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안해
헤어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다. 때로는 시답지 않게, 때로는 진지하게 데이팅 앱에 몰입했다. 일주일을 약속으로 꽉 채워 정신과 몸을 지치게도 해보고 주변 사람에게 한탄도 해봤다. 한편으로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여전히 감정적 끈을 놓지 못한 채 해석의 늪에 빠져있었다. 갖은 행동들이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된 걸까. 어느 날 문득 꺾였던 정신이 탁 섰다. 아, 나는 아니구나.
이제는 안다. 끝이 보이는 터널 속에서 부러 빛을 등진 채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마음을. 수신인 없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전화기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촌스러운 마음을. 혼자 하는 사랑의 유일한 교훈은 짝사랑하는 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모든 공감이 귀납적으로 이뤄지진 않지만, 적어도 나 같은 사람은 경험해야 겨우 아는 인물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 거,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