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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만큼 달콤해진다

by 궁금한 민지

대학시절, 제가 살던 곳은 교회 뒤 한 골목을 꺾어 들어간 다세대 주택이었는데요. 길이 살짝 경사진 덕에 2층이었던 방에서 문을 열면, 앞집 옥상이 내려다 보였습니다. 한번은 앞집 청년이 옥상에서 무언가 하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더랬죠. 그때 나중에 옥상이 딸린 다세대 주택이 나란히 붙어있는 옥탑에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엉뚱한 상상은 거기서부터 시작됐죠.

후드 집업을 입고 옥상에 올라 귤을 던져주겠다고요. 제가 주인공은 아니고 어떤 여자를 상상했어요. 후드 집업을 내리면 드러나는 튼실한 가슴, 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옷 안에서 햇볕을 받아 탄력 있게 빛나는 귤을 꺼내 옆집 청년에게 던지는 여자를 말이죠. 짧은 상상은 이야기를 더 전개시키지 못하고 여기서 머무르곤 했습니다. 왜 오렌지가 아니고 귤인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귤은 주무를수록 스트레스를 받아서 달콤해진다고 합니다. 당시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갸우뚱했는데요. 찾아보니 충격을 받으면 ‘에틸렌’이라는 호르몬이 방출되면서 당도를 올린다고 합니다. 단맛을 좋아하는 벌레를 유혹해 씨앗을 널리 퍼뜨리려는 본능이라고 하네요. 그냥 죽을 순 없고 2세는 남겨야겠다, 이런 심보인 걸까요. 자기방어가 곧 생존 기제라니. 역시 자연은 오묘합니다.

단맛은 귤의 성숙도를 가르는 척도입니다. 아픈 만큼 달콤해지는 것이 귤이었네요. 물론 가슴은 주무른다고 달콤해지진 않습니다(?).

교훈적인 결론은 좋아하지 않지만, 야한 상상은 이처럼 지식을 늘리는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상상하기엔 외부 자극이 너무 부족한 요즘이네요. 어디 옥상이라도 올라가 볼까요?

사진 @Dainis Graveris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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